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돋을볕 Apr 05. 2023

시골교회에서 자랐어요

진짜 꽃에선 비 냄새가 난다

  어린 시절, 가족을 제외하고 자아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 “교회”라고 적은 적이 있다.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오기까지 시골 마을의 작은 교회는 '나'라는 사람을 빚어갔다. 고등학생이 되어 기숙학교에 입학하며 타 지역으로 나가기까지 거의 대부분 교회에서 생활했다. 오십여 가구가 모여사는 시골 마을 언덕에 있는 작은 교회. 교회에 관한 최초의 기억은 높은 탑에 달린 종을 방앗간을 하던 집사님이 특정 시간마다 댕그렁 댕- 댕그렁 댕- 울리던 모습이다. 할머니의 구술로만 기억되는 개척 목사님 후임으로 젊은 목사님 내외분이 오셨다. 어른들이 모여 젊은 분이 오셨다며, 이야기 나누던 모습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낡은 교회를 헐고 다시 교회를 지었다. 나는 엄마를 따라 구석에 펴진 천막에 앉아 무언가를 먹거나 함께 벽돌을 나르기도 했다. 어른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귀여워해주셨다.


  가파르고 작은 돌계단을 오십여 개 올라가면 조그만 운동장과 도서관, 교육관이 딸린 교회가 나왔다. 빨간 벽돌로 지은 교회. 새롭게 지어진 교회에는 어린이들의 공간이 생겼다. 그곳에서 목청이 터져라 큰소리로 찬양을 부르고 말씀을 암기하고 설교를 들었다. 여름성경학교를 할 때 처음 해보는 체험과 실험들이 신기했다. 엄마가 간식이나 식사 봉사로 음식을 만들어주시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젊은 목사님과 사모님은 교회 옆에 지어진 사택에서 사셨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목사님은 컴퓨터를, 사모님은 피아노를 가르쳐주셨다. 덕분에 나는 동네에서 최초로 윈도 컴퓨터를 가진 아이가 되었고, 이를 밑받침 삼아 나중에는 컴퓨터 자격증을 여러 개 딸 수 있었다.

 

아직 그대로인 피아노와 드럼(메인 사진)

  시골에서 보는 것은 논, 밭, 바다뿐이던 우리에게 도시 구경을 많이 시켜주셨다. 서울로 농구 경기나 체험 학습을 종종 갔고 돌아오는 길엔 식당에 들러 맛있는 음식을 사주셨다. 사모님은 나에게 음악과 구연동화를 가르쳐주셨다. 덕분에 동요 대회를 나가 여러 번 수상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목사님은 차를 운전하시고 사모님은 반주를 해주셨다. 언니들에게 물려받은 운동화 밖에 없던 내게 반짝이는 빨간 구두도 선물해 주셨다.


  목사님은 글쓰기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셨다. 여러 매체에 글을 투고하고 시골과 농촌의 일상을 알렸다. 주보 칼럼에 농민 일보에서 발췌한 농업 기술과 소식을 싣기도 하셨다. 중학생 때는 악기를 배웠다. 나는 드럼을 택했고 교회에서는 야마하 드럼을, 집에서는 냄비를 두드리며 연습했다. 일렉 기타, 베이스 기타,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 건반, 드럼, 아프리카 봉고, 싱어로 구성된 밴드도 만들었다. 목사님이 직접 자작곡 한 노래로 밴드 대회도 나가고 다른 밴드와 합주를 하기도 했다.


  마땅히 공부할 곳도 없고 책도 부족했던 내게 교회 도서관은 신세계였다. 기숙학교에 다니던 고등학생 때는, 주말마다 집에 왔는데 그때마다 교회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작은 책상 두 개와 의자 여섯 개, 목사님의 소장 도서가 전부였지만 나에겐 힐링 장소였다.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올라간 뒤엔 집에 자주 내려가기 힘들었다. 자연스레 서울에 있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고향 교회는 가끔씩 찾았다. 목사님이 들꽃을 키워 교인들과 들꽃 축제를 열었고 이후엔 시 사업으로 확대해 작은 수목원과 카페를 여셨다. 나는 축제 때마다 내려가 무엇이든 도왔고, 할아버지가 짚신 체험을 열고 할머니와 엄마가 국수를 삶고 아빠가 축제 관리 하는 풍경을 보았다.


  취직 후 교회에 내려갔을 때, 목사님은 시골 학교의 셔틀버스 기사가 되어 계셨다. 젊은 사람들이 떠난 농촌엔 아이들도 없다. 그나마 몇 없는 아이들을 위해 셔틀버스 운전을 도맡고 계셨다. 여전히 그 아이들을 데리고 하교 후에 바다도 보여주고 사진도 찍어 주고 소풍도 다니고 계셨다. 사모님은 초등학교의 방과 후 교사로 일하며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공연을 여셨다.


  아이 둘의 부모가 되어 가끔 교회를 가보면, 이제 교회엔 장년층 이상의 분들만 보인다. 우리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던 몇 년 전만 해도 시골치고 제법 많은 교인이 있었지만 이젠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 동네 주민 대부분이 이 교회를 다니는데 교회와 일상이 결합되어 있던 삶도 코로나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걷기도 힘든 노인분들은 아예 교회를 못 나오고, 연세가 있으신 우리 부모님이 그나마 젊어서 장로와 권사로 많은 일을 감당하고 계신다. 코로나 이전엔 구역예배란 게 있었다. 집이 가까운 이웃끼리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짧은 예배를 드리고 다과를 나누며 서로 안부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우리 구역의 구역장이셨다. 할아버지가 읽어주던 말씀을 듣고 엄마가 챙겨주던 간식을 먹는 게 즐거움이었다.


  이제 시골 교회에는 구역 예배도, 아이들도, 젊은 사람들도 없다. 다만 여전히 목사님과 사모님이 계신다. 이제는 지긋한 주름살과 흰머리가 세월을 보여주지만 여전히 나를 볼 때마다 꼭 안아주고 손을 맞잡아 주신다. 볼 때마다 키가 자라는 우리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고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신다. 고령화로 동네에 빈집이 늘어가듯, 교회도 없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그러나 교회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다. 아빠가 장로가 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교회 바닥을 온돌로 바꾸고 의자를 푹신한 걸로 바꾼 것이었다. 앉아있기도 힘든 연로한 분들에게 교회는 또 다른 쉼터이자 젊은 시절을 기억하고 여전히 젊게 살게 해주는 활력소로 보인다.


  사모님은 여전히 예배 반주를 하시고, 목사님은 아이패드와 대형 스크린을 연결해 눈과 귀가 어두운 분들에게 말씀과 찬양 가사를 보여주신다. 도시 교회와 연계해 농산물 판매를 돕기도 하고, 지역 방문 장소를 개발해 SNS에 홍보한다. 작은 카페에서 직접 커피를 내리기도 한다.


  올봄에도 교회 마당에 개망초와 할미꽃, 수선화가 피었다. 길가에는 깊은 밤 별빛 같은 봄까치꽃과 여울물 같은 냉이꽃이 사방을 메운다. 그리고 도시에선 보기 힘든 토종 흰민들레가 함빡 웃는다. 보는 사람이 많든 적든 삶에 풍요를 더하는 들꽃. 그래서 목사님이 교회 이름을 들꽃으로 지은 걸까? 도종환 시인은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을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목사님과 사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게 알진 못한다. 어렸을 때라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빠, 엄마의 손을 붙잡고 교회를 다니던 즐거운 기억 속 한편에 계실 뿐이다. 다만 어린 시절의 추억에 많은 도움을 주셨고 큰 영향을 끼쳤다. 살아가는 게 힘든 일임을 알아가는 시기가 되니 어릴 때 다니던 교회 생각이 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 흔들리며 줄기를 곧게 세우고,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을 피우는 삶. 진짜 꽃에선 비 냄새가 난다.



초고 2023.02.26

퇴고 2023.04.05




작가의 이전글 다섯 살의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