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있는 기쁨을 누려라
키보다 높은 큰 책장에서 책을 꺼낸다. 표지와 제목은 눈에 익지만 도저히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하물며 이미 샀던 책을 또 산 적이 여러 번이다. 이러면서도 책을 빠르게, 많이 읽는 사람이 지적으로 보인다고 믿었다. 속독으로 시험공부를 하고 요약을 능숙하게 해내던 시절부터, 책은 내게 ‘속도와 효율’의 대상이었다.
책을 사는 건 또 얼마나 좋아했던가. 월급날이면 여러 권을 한꺼번에 사고, 그저 쌓아두는 것만으로도 이미 읽은 것처럼 뿌듯했다. 하지만 몇 장 넘기다 책장의 장식품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책을 소유하는데만 급급했다.
책장에 가득 꽂힌 책을 보며 멍하니 바라보던 어느 날,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진짜 독서인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건 아니야. 한 권을 읽더라도 제대로 읽고, 느끼고 싶었다. 천천히 가더라도 허무하지 않은 독서를 하고 싶었다.
필사를 시작했다. 김영하 작가는 필사가 가장 극단적인 느린 독서법라고 했다. 책 속의 문장을 천천히 공책에 옮겨 적으며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썼다. 특히 마음에 남는 문구는 붓펜으로 다시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성급한 마음은 여전했다. 차분히 시작했던 손이 점점 양을 늘리는 데 신경 쓰고 있었다. 필사노트가 한 권 한 권 쌓일 때마다 뿌듯해하는 내 모습에 멈칫했다. 처음 마음먹었던, 가슴으로 내려오는 독서가 아닌 또 다른 속필사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이게 아닌데......’
그렇게 쓴 필사 공책을 다시 넘길 때마다 낯선 문장이 튀어나왔다. 분명 내가 옮겨 쓴 글인데,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노력은 쌓였지만, 기억은 쌓이지 않았다. 필사를 하며 느림을 연습했지만, 어느새 또 양을 채우는 데 집착하고 있었다.
그 무렵, 사카토 켄지의 ‘메모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장을 넘기다 눈이 번쩍 뜨이는 문구를 발견했다.
‘기록하고 잊어라. 잊을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해라.’
잊어도 된다니. 다 기억할 필요가 없다니. 기억은 메모에게 맡기고 잊으라니. 갑자기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나는 그 문장으로 붓펜으로 옮기고, 작은 그림과 함께 오래 들여다보았다.
돌아보면 큰 변화는 없어 보이지만, 내 안에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책의 내용은 잊었지만 단순한 지식이나 기억이 아닌, 나를 움직인 무언가. 예전 같으면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출렁였을 텐데, 이제는 그저 미소 짓고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보이지 않던 마음의 근육이 자라 있었다.
이제는 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일이 아니다. 책은 완벽하게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단 한 문장이 나를 바꾸면 된다. 내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에겐 완벽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 권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