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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Jun 17. 2023

여유의 이유

지나쳐도 괜찮아

중학교 3학년 짜리 막내가 기말고사 공부를 하겠다고 스터디카페에서 새벽에 오겠단다. 불안한 마음에 아이가 도착한 걸 확인하고 새벽 2시 반 넘어 간신히 잠에 들었다. 습관이 무서운지라 아침 6시가 되니 눈이 떠진다.  몸은 아직 침대밑으로 꺼지는데 눈만 뜬 상태. 아. 피곤하다.


오늘은 책 쓰기 연수를 가는 날이다. 잠의 부족함이 몸의 피곤함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주말 아침이었지만 그래도 1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그 길을 여유 있게 즐기고 싶어 7시에 집을 나섰다. 하지만 아직도 몸도 머릿속도 땅에 질질 끌려가는 듯했다.  


습관적으로 이어폰을 귀에 꽂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지하철에 올랐다. 계속 졸음이 왔다. 혹시나 지나치지 않을까 수시로 도착역을 확인하며 신경 쓰며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이어폰의 목소리가 희미해지던 순간,

-다음 역은 석수, 석수역입니다.

정신을 번쩍 들었다. 아뿔싸! 벌써 내가 내려야 할 역을 2개나 지나쳤구나. 아.. 이런. 지난주에는 버스를 반대 방향으로 탔었는데.


하지만 뭐 어때, 돌아가면 되지. 여유 있게 나온 보람이 있다. 반대편 승강장으로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는 지하철을 다시 탔다. 피곤한 몸으로 안양역에 도착해 나를 조금 위해주는 마음으로 택시를 탔다. 넉넉히 출발해서 다행이었지. 그러니 정신 차릴 아메리카노도 마실 여유도 있네. 조금 일찍 나오니 계획이 틀어져도 다시 돌아갈 수 있으니 좋다. 연수원에 도착해 탁 트인 하늘과 초록공간을 보니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여유가 없다고 한다. 완벽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 보니 시간의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챙길 새가 없다. 집에서, 학교에서 수많은 역할을 해내다 보니 정말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는 여유라는 녀석은 절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남아서가 아니라 부족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여유가 생긴다는 것을.

-이걸로 충분해.

-100%가 아니면 어때.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

-괜찮아, 돌아가도 돼.


공간의 여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좁은 곳보다 넓게 펼쳐진 야외로 자연으로 우리가 주말마나 나가려는 이유도 여유를 찾고자 하는 마음에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나의 부족함도 봐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실수도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다. 잠의 여유가 없을 때도 짜증이 밀려오고 감정의 여유가 사라진다. 버티다가도 조금의 여유도 들어갈 수 없을 때면 가슴이 턱 막혀온다. 번아웃은 여유를 잃어버릴 때 온다.


예전에는 왜 나는 100%의 최선을 다하지 못할까 불만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100%가 아니어서 여유를 즐길 줄 아는 내가 좋다.  나를 위해 남긴 20%로 오늘처럼 실수해도 부드럽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이다.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지나치고 버스를 반대로 타고 마시던 커피 한 방울을 옷에 떨어뜨려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나를 잃어버리지 않게 말이다.


오늘 돌아가는 길에는 처음 가는 까페를 찾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여유를 가져보려 한다. 그래야 사춘기 중3 딸아이의 날카로움도, 고된 일상도 이겨낼 마음의 힘이 생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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