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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Jul 06. 2023

완벽하지 않을 권리

잊을 수 있는 기쁨을 누려라

나에게는 참 고약한 독서 습관이 있었다. 지적 허영심.  책을 많이 읽으면 좋은 줄 알았다. 학교 다닐 때는 속독을 많이 했다. 물론 공부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빨리 읽고 요약하기는 정말 잘했다. 그리고 그게 책을 읽는 방법인 줄 알았다.  


하지만 급한 불만 끄면 이내 잊고 그대로 덮었다. 어떤 책은 예전에 읽었음에도 처음 본 책인 줄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취미가 독서라 하면 그 깊이와 상관없이 지적인 분위기를 연상한다. 너무 흔하게 거론되어 그 의미가 퇴색되기도 하지만 나 자신도 그렇게 얘기하고 진짜 책을 좋아한다고 믿었다.


책을 사는 건 또 얼마나 좋아했던가. 월급날이면 책 6, 7권을 한꺼번에 사서 쌓아 놓고 이미 읽은 것처럼 뿌듯했다. 나는 월급 받아 제일 먼저 책 사는 지식인이야 하면서. 하지만 그 책들 중에는 몇 장만 넘기다 책장의 장식품으로 꽂혀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사는 행위만으로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처럼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던 건 아닐까. 책을 소유하는 것으로 지식을 내 것인 것으로 착각하는 나는 사실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소유하는 사람이었다.


4개의 책장에 가득한 책을 보며 도리어 공허함을 느낀 어느 날, 독서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다. 뭔가 알찬 느낌을 받고 싶었다. 한 권을 읽더라도 제대로 읽고 생각하고 느꼈으면 했다. 무언가 허무하지 않게 천천히 가더라도 충만한 느낌을 받고 싶었다.


김영하 작가가 필사는 가장 극단적인 느린 독서법라고 했다고 한다. 잘못된 습관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추려고 필사를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빨리 읽고 난 후 다시 공책에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찾아 썼다. 의식적으로 천천히 음미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구를 다시 붓펜으로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성급한 마음은 여전했다. 처음엔 도서관에서 빌린 2~3권의 책을 정신없이 썼다. 무의식적으로 속도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사노트가 한 권 한 권 쌓일 때마다 그 양으로 뿌듯해했다.  어느 순간 처음 마음먹었던, 가슴으로 내려오는 독서가 아닌 또 다른 속필사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이게 아닌데......’

다시 필사공책이 7권쯤 쌓여갔을 때, 처음 썼던 공책을 넘겨보았다.

‘이런 내용이 있었나?’

여전히 낯선 문장들이 보였다. 내가 여태 노력했던 것들이 소용이 없었던 것이었나? 나는 필사조차도 즉흥적으로 생각하고 일회적으로 했단 말인가?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다. 내가 허투루 한 건지, 아니면 이젠 그렇게 노력해도 내 머리의 기억력이 따라가지 못하는 건지 어쩜 이렇게 생각나지 않는 것이 많은지.....


어느 날  사카토 켄지의 ‘메모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거기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이 문구를 발견했다!  너무 반가웠다. 읽고 또 읽었다. 문구를 따로 적어 다시 붓펜으로 그림과 함께 써 보았다. 그리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기록하고 잊어라. 잊을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해라


너무 위로가 되는 글귀였다. 잊어도 된다니. 메모하고 잊어도 괜찮다니. 다 기억할 필요가 없다니. 게다가 메모 자체로 남기고 난 후 창의적인 생각을 하면 된다니..... 잊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니. 정말 멋진 말이지 않은가. 물론 속뜻은 메모라는 방법을 통해 기억을 보완하고 두뇌는 단순한 기억이나 저장보다 창조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멘톨향이 가득한 샴푸로 머리를 감은 듯 시원해졌다.


 처음 필사한 때부터 지금까지를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 보면 눈에 띄는 변화는 없어 보이지만 이미 내 마음속의 변화는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말로 표현할 만큼 뚜렷하진 않지만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고 타인의 말에 흔들리거나 상처받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마음의 근육이 어느새 단단해진 것이다. 읽은 책을 다 기억해야 완벽한 독서라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완벽해야 제대로 한 것 같은 경직된 생각이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책을 대하기가 수월해졌다.


엘리자베스 브라미의 ‘우리 가족 인권 선언 시리즈’이라는 재미있는 책이 있다. 자녀의 입장, 엄마의 입장, 아빠의 입장 등 각자의 상황과 입장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내용을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그중 엄마와 아빠의 권리에 대한 내용이 재미있었다. 엄마에게는 완벽하지 않아도 될 권리를, 아빠에게는 힘이 세지 않아도 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내가 독서에 경직된 생각으로 인해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처럼 우리는 무수히 많은 고정관념 때문에 스스로를, 서로를 힘들게 한다. 또한 경직된 사고로 삶의 자유로움을 방해한다. 지나치게 높게 설정한 당위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도 향유하지도 못한다. 불행해지는 지름길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는 삶을 유연하게 만든다. 타인을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해 준다. 완벽하게 독서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내용을 다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책 속의 한 문장이 자신의 마음에 남았다면 그걸로 된 거다.


우리에겐 완벽하지 않은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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