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색은 그레이
둘째가 머리 색을 바꾸고 왔다. 요즘 유행인 애쉬 그레이 뭐라나.
“엄마, 어때? 생각보다 색이 덜 나온 것 같아.”
“이쁘네, 분위기도 있고.”
세련되어 보이는 머리색에 분위기 좋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딸은 자기 마음에 쏙 들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쉬운 표정으로 다음 머리색을 고민하겠지.
어떨 때는 주황빛이 도는 색으로 또 어떨 때는 살짝 푸른 빛이 도는 색으로 염색하기도 했다. 너무 튀지 않은 푸른 그레이색은 나도 탐이 났다. 하지만 나는 이제 예쁜 염색이 아닌 흰머리를 가리기 위한 뿌리염색을 할 나이다.
내가 했던 가장 컬러풀한 머리색은 와인색이었다. 대학 때 한창 유행이었다. 긴 머리를 염색하고 다닐 때면 왠지 모를 자신감도 생겼다. 나중에 보니 우리 과의 여자애들 대부분이 다 이 색으로 염색을 했더랬지. 그리고 거기까지가 내 모험이었다.
둘째가 머리색을 애쉬나 주황빛, 살짝 푸른기가 있는 색으로 염색을 했을 때 좀 부러웠다. 저렇게 할 수 있는 용기가, 분위기가, 그리고 나이가.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걸 나는 그 나이 때에 왜 그리 겁내했을까?
나는 이제 패션 염색이 아닌 흰머리를 가리기 위한 소위 뿌염을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이미 머리칼의 절반이 흰머리인데, 그걸 안지도 한참 되었는데 자꾸 덮어버린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가르마에서 하얀 머리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시간이 어찌나 빨리 오는 것 같던지. 볼 때마다 너무 신경이 많이 쓰여 참지 못하고 바로 미용실을 찾는다. 염색을 하고 나면 왠지 젊어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산뜻하다. 사실 그저 덮었을 뿐 흰머리가 사라진 건 아닌데.
이미 반백으로 염색 없이 지내는 남편은 나를 볼 때마다 이야기한다.
“뭘 염색을 해? 그냥 자연스럽게 두지.”
“흰머리 나는 거 보기 싫어. 나는 할 거야.”
아직은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다고, 더 나이가 들면 혹 모를 일이다.
몇 년 전에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던 강경화 장관을 처음 보았을 때 정말 충격이었다. 흰머리 그대로가 저렇게 멋질 수 있다니! 와, 나도 저렇게 흰머리로 당당하고 싶다! 최근에 많이 등장하는 시니어 모델 중에도 그레이 색의 본인 머리카락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감탄한다. 물론 그들의 태도, 자세, 외모 등이 그 당당함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말이다.
여전히 나는 염색을 한다. 언제쯤이면 나의 그레이 색을 인정하고 커밍아웃할 수 있을까? 젊어서도 머리색을 바꾸는 용기도 없어 못했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머리색도 보지 못하는 겁쟁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바꾸기 위한 염색도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하는 건 더욱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