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론 Jul 14. 2023

정지 아닌 잠깐 멈춤

가끔은 삶에도 빨간 불이 필요하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고 땡볕으로 온 세상이 끓어오르는 요즘, 학교는 학기말을 달려가느라 바쁘다.


성적처리에 학교행사는 여전하고 처리해야 할 업무도 가득하다. 성적처리, 행사진행, 업무 등 이 짧은 낱말 속에 결코 짧지 않은 과정들이 있음을 우린 너무나 잘 안다. 게다가 올해는 4세대 나이스라고 성적을 비롯한 교육과정 전반의 평가와 정보를 넣는 시스템이 바뀌고 그 마저 오류가 기상천외하게 많아 기운 빠지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도 방학이 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부장인 나는 일찍 출근하는 편이다. 학교에서의 부장은 일반 회사의 그것과 완전 다르다. 그냥 평교사면서 업무가 늘 뿐이다. 물론 20년째 동결된 한 달에 7만 원이라는 아주 소소한 부장수당을 받긴 하지만.


7시 30분 전이면 학교에 도착해 창문을 열고 마음을 정돈하는 아침 드로잉을 그리기도 한다. 8시가 넘으면 오늘의 업무를 확인하고 공문을 작성하기도 하고 그날의 수업준비를 한다. 그러다 보면 복도가 시끌벅적해지면서 아이들이 하나 둘 몰려오고 다시 바쁜 하루가 시작된다. 아이들이 돌아간 오후에도 아이들 교과보충과 공문 처리, 수업 준비 등 정신없이 시간이 가다 어느새 퇴근시간이 되곤 했다. 화장실 가는 것도 잊을 때가 다반사다.


여전히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낸 지난 금요일 아침이었다. 7시에 출발하여 학교까지 운전하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오늘 할 일을 시뮬레이션해 본다. 출근길에서 이미 업무 중이었다.

‘오늘은 임원선거가 있지?’

‘아, 다음 주 주간학습안내랑 이번주 학급살이 글도 수정해서 출력해야지.’

‘이번주에 다녀온 연수 보고서도 써야겠네.’

‘아, 맞다. 막내 영화도 예매해 달라고 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은 학교 업무와 집안일까지 섞여 출근길이 생각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도로 앞을 보는 눈과 머릿속은 서로 딴생각 중이었다.


학교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서기 위해 우회전을 하려는데 빨간 신호등에 걸렸다. 꽤 큰 사거리여서 한참 서있었다. 신호등의 지연숫자가 80을 가리킨다. 한참 서있겠구나.


앞의 풍경을 멍하니 보았다. 구름 하나 없는 연한 파스텔톤의 이른 아침 하늘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 파란 하늘아래 존재감이 두드러진 빨간 신호등. 그래, 나 멈춘 거지.


순간, 학교 일도 집안 일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아, 예쁘구나.‘

그 말간 아침 하늘에 강렬한 빨간색.

“휴!”

크게 숨을 한 번 쉬었다. 머릿속에서 학교일, 집안이 희미해졌다. 개운하다. 그래,  잠시 멈춤이 필요했구나. 그대로 서버리는 게 아니라 잠깐 멈춤. 잠시 숨 쉴 수 있는 여유가 없었구나.  


초록불이 들어왔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주차를 하고 여전히 파란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교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방금 본 아침에 본 풍경을 그린다. 하늘과 빨간 신호등. 그저 달려만 가느라 달궈진 엔진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던 나의 하루하루를 잠시 멈출 수 있었던 순간. 빨간 불이 들어오면 경고의 의미로도 쓰인다지만 삶의 빨간 불은 잠시 쉬어가라는 알아차림의 신호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흔하디 흔한 말. 흔하지만 참 지키기 어려운 말. 삶이 내 속도보다 과속할 때는 잠시라도 빨간 신호등 앞에 서는 게 좋은 듯하다. 잠시 서서 알아차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의 순간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