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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Jul 24. 2023

서서히 스미는 것-시간이 걸려도 가끔 멈추어도 괜찮아

6년 사이의 그림


2017년 8월, 1일 1그림을 시작했던 처음 어느 날의 드로잉. 막내 데리고 직업체험관을 방문했다가 기다리면서 끄적이던 그림이다.  그리고 2023년 6월, 우리 반 아이들의 시간을 그린 드로잉. 둘 다 지우개를 쓰지 않고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은 가벼운 드로잉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 시간의 간극은 약 6년.​


나는 연필초상화로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했다. 세밀하게 그리는 인물화는 천천히 보고 조금씩 선과 색을 쌓아 올린다. 정성도 많이 들고 그만큼 시간도 많이 든다. 기초가 없던 나에게는 더욱 그랬다. 끈기도 없던 내가 지금 봐도 놀랄 정도로 열심히 했다. ​


어느 순간부터 순간의 장면을 마음을 담아 가볍게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그때 마음에 남는 장면들을 A5 정도의 작은 드로잉북에 남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 그림은 그 그림들의 초창기이다. 연필초상화와 달리 빠른 시간에 그리다고는 하지만 관찰을 하면서 눈과 손을 거의 번갈아 움직인다. 시간은 얼마 걸리진 않지만 지금의 내 실력이 온전히 드러난다. ​


지금 보면 너무 부족했던 그림. 선도 자신 없고 털선처럼 겹쳐 그리고 지저분하다. 얼른 그리고 싶은 급한 마음에 선을 그으니 관찰이 부족했던 부분이 드러난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연습하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참고 그렸던 것 같다.  이 그림 말고도 다른 그림도 마찬가지. ​


연필초상화는 비율을 따져 가이드선을 따고 그리는 캐논 기법이나 칸을 나누어 비율대로 옮겨 그리는 그리드 기법, 그도 아니면 형태 따기가 제일 만만한 트레이싱 기법까지 있지만 도리어 이런 가벼운 드로잉은 있는 그대로 눈과 손이 보고 그린다. 그래서 더욱 그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


가벼운 매일의 그림으로 내 감정과 생각, 시선이 가 있는 곳을 그리고 싶었던 나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듯이 매일 그렸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래서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을 찢고 싶은 유혹도 들지 않게 스프링이 아닌 떡제본되어 있던 드로잉북으로 구입했다. 되도록 어떤 그림이든 남겨놓자. 그것도 다 나의 과정이니까. ​


물론 치열하게 하진 않았다. 1일 1그림이라고는 하지만 하다가 멈춘 적도 여러 번 있다. 몇 달 동안 연필을 한 번도 들지 않은 적도 있고 또 어느 때는 필 받아서 폭풍처럼 그리기도 했다. 나 혼자 하는 연습이니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나아갔다. 어디 가서 배우는 것도 가르침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나 혼자의 끄적임이었지만 그래도 이러다 보면 뭔가 나아지겠지 막연한 생각으로 한 장 한 장 채워갔다.

그리고 6년. 어떤 사람은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훨씬 더 실력이 좋아지거나 배우면서 밀도 있게 연습했다면 실력을 올리는 데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이건 그냥 나의 빠르기이자 최선의 시간이었다. 아마 이렇게 급하지 않고 느리게 나아갔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림을 놓지 않고 그리지 않았을까. 나처럼 끈기 없는 사람이. 유일하게 오래 하는 그림이 되기까지 나만의 속도는 필수였다. ​


혼자 그림을 그리면서 과연 이렇게 해도 실력이 늘까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기본을 배우고 체계적인 가르침이 있다면 당연히 쑥쑥 늘겠지만 상황상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시간을 들이면 실력이 나아진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러니 멈추지 말라고. 천천히 해도 괜찮다고. 나도 그랬으니까. ​


물론 지금 나의 그림들이 객관적으로 잘 그리시는 분들에 비해 대단하다고 말하기에 아직도 부족하다. 그렇더라도 그 실력의 간극에 있었던 시간과 나름의 노력이 모두 헛된 건 아니었다는 걸 6년 전 그림과 비교해서 느껴져 뿌듯하다. 중간에 연필을 들지 않았던 시간들까지도 그림을 계속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안다. ​


그림만 그리는 생활도 아니고 우리는 직장생활도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고 온갖 집안일과 신경 쓸 일들이 많아 그림이 뒷전이 될 수도 있다. 당연히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걸 먼저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생활들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나만의 시간도 가지는 것이 필수니까. 그런 시간이 고파지면 그림을 그리자.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생활 가운데 그림 그리는 시간을 분명 에너지를 줄 것이다.

그리고 싶다면, 그저 끄적이자.

너무 힘주지 말고 매일이라는 틀에 갇히지 말고 그냥 내키는 대로.

그리고 잊지 말자.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루한 시간도 견디고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도 지나가고 때로는 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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