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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Aug 13. 2023

지우개를 쓰지 않는 이유

인생은 지우개 없이 그리는 그림이다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도구를 이야기하라 하면 가장 기본적인 4b연필과 지우개를 떠올릴 것이다. 연필과 지우개는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단짝이다.

꾸준히는 아니지만 햇수로 10년 넘게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나도 다양한 지우개가 있다. 말랑한 미술용 지우개, 잘라 좁은 부분을 지우거나 흰 선을 만들 때 쓰는 플라스틱 지우개, 마치 고무찰흙처럼 말랑하게 뭉쳐서 연필의 흑연을 흐리게 만들 수 있는, 일명 떡지우개라고 불리는 니더블 지우개까지. 요즘에 미세하게 진동하여 지워주는 전동지우개도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지우개는 안전지대와 같다.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지우고 그리면 되니까. 지우개가 옆에 있으면 언제든 지우고 그릴 수 있다는 마음의 안정을 가져왔다. 실패해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가! 연필로 그림을 그릴 때는 그 주변이 지우개 가루로 가득하다.

기본을 배운 것도 아니고 학원을 다닌 것도 아닌 나도 처음 내 맘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지우개를 항상 옆에 두었다. 연필그림을 많이 그렸으니 더욱더. 선을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지우고, 다시 선을 그리고. 그렇게 내 딴에 마음에 들 때까지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지우개를 점점 쓰지 않게 되었다. 지우개를 쓰지 않고 온전히 연필에만 내 감각을 맡기는 과정이 좋기도 했고 조금 부족한 그림이어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편해질 즈음 지우개는 그림 그리는 내 옆에 없다시피 하다. 아예 연필도 사용하지 않고 연필보다 잘 안 지워지는 오일콘테로 그리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연필처럼 나온 오일콘테는 내가 정말 즐겨 쓰는 재료이다. 지우려면 어느 정도 지워지겠지만 연필처럼 깨끗하게 사라지진 않는다. 어느새 내 옆에는 지우개가 없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지우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서 그야말로 한 번에 일필휘지로 휙 그려내는 건 아니다. 어쩌다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이 나올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려놓고 아쉬움을 느낀다. 지우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들었다. 지우개를 안 쓰게 된 처음은 아마 귀찮음이었을 것이다. 지우고 다시 그릴까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애써 그렇게까지 하지 않은 나의 원초적인 게으름. ​


그러다 정말 어느 순간부터 그림을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안 하게 되는 순간이 왔다. 그냥 그리는 거다. 그리는 순간에 몰입하고 그 결과 나온 그림은 그대로 바라보았다. 물론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냥 내 손에서 나온 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찌그러지면 찌그러진 대로, 참고한 대상과 달라져 있어도 있는 그대로 결과물을 바라보았다. 지우개를 써도 좀 더 완벽하게 다듬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림의 퀄리티와 별개로 지우개를 쓰지 않으면서 나는 그림에서 자유를 느꼈다. 지우개로 얻는 자유도 있지만 지우개를 떠나보냄으로 얻은 자유가 나에게는 더 컸다. ​



모든 선을 사랑하라.

모든 선을 허용하라.​



지우개는 완벽한 그림을 향한 중요한 도구이긴 하지만 나는 내 손에서 탄생한 모든 선을 인정하는 방법을 택했다. 객관적인 평가에서 벗어나 내 눈과 손이 그린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이로서 편안해진다.​ 내게 지우개가 없이 그림을 그린다는 건 부족한 그림이더라도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을 되돌리는 듯한 지우개의 마술이 없으니 지금 손에 든 연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 최선의 순간을 지나고 난 후의 그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게 된다. 비록 처음 예상과 달라진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수정이 용이한 디지털 그림에 손이 안 가는 건지도 모른다.


물론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거나 선물을 한다든지 하는 사교적인 그림일 경우 지우개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 그리는 그림들은 종이와 오일콘테만 있으면 그냥 그린다. 잘 그려서가 아니라 그리는 순간의 나에 몰입하기에.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인생은 지우개 없이 그리는 선명한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한번 그려지면 돌이킬 수 없다. 후회스러운 행동을 되돌리기 위해 지우개로 지워보기도 하지만 완벽한 삭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깨끗이 지우려 해도 남은 연필자국처럼.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삶을 생각한다. 지우개가 필요 없는 완벽한 인생이 어디 있으랴. 원하는 대로 그려져도 생각한 대로 그려지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할 내 삶인데.


지우개 없는 그림은 나에게 삶을 가르쳐주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용기 있게 받아들여라.

나의 불완전한 순간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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