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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Oct 23. 2023

시간이 걸려도 괜찮아

나의 속도 존중하기

2017년 8월, 매일 그림을 그리기로 한  어느 날의 스케치다. 아이를 데리고 체험학습을 갔다가 기다리며 그린 그림이다.  드로잉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했던, 그저 끄적거림 같은 낙서였다. 그리고 2023년 5월, 우리 반 아이들의 시간을 그린 드로잉. 둘 다 지우개를 쓰지 않고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은 가벼운 드로잉이다.

그 시간의 간극은 약 6년.


순간의 장면을 가볍게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 그때 마음에 남는 장면들을 A5 정도의 작은 드로잉북에 남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매일 작게 그리기 시작한 초창기 그림이다. 빠른 시간에 그리다고는 하지만 관찰을 하면서 눈과 손을 거의 번갈아 움직인다. 시간은 얼마 걸리진 않지만 기초가 없는 지금의 내 실력이 온전히 드러난다. 이런 가벼운 드로잉은 간결한 선들로만 되어 있어 실력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더 정직하다.


지금 보면 너무 부족했던 그림. 선도 자신 없고 털선처럼 겹쳐 그리고 지저분하다. 얼른 그리고 싶은 급한 마음에 선을 그으니 관찰이 부족했던 부분이 드러난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연습하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참고 그렸던 것 같다.  

가벼운 매일의 그림으로 내 감정과 생각, 시선이 가 있는 곳을 그리고 싶었던 나는 매일 그렸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렸다. 대신 끝까지 완성했다.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을 찢고 싶은 유혹도 들지 않게 스프링이 아닌 떡제본되어 있던 드로잉북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되도록 어떤 그림이든 남겨놓았다. 그것도 다 나의 과정이니까 사랑스러웠다.


물론 치열하게 하진 않았다. 생업도 이어야 하고 엄마로 아내로 여러 역할도  수행해야 하니까 일상도 바빴다. 1일 1 그림이라고는 하지만 하다가 잠시 쉰 적도 여러 번 있다. 몇 달 동안 연필을 한 번도 들지 않은 적도 있고 또 어느 때는 필 받아서 폭풍처럼 그리기도 했다. 나 혼자 하는 연습이니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나아갔다. 어디 가서 배우는 것도 가르침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나 혼자의 끄적임이었지만 그래도 이러다 보면 뭔가 나아지겠지 막연한 생각으로 한 장 한 장 채워갔다. ​


그리고 6년. 밀도 있게 연습했다면 실력을 올리는 데 시간을 단축시키거나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 하지만  나의 빠르기이자 나에게 최선의 시간이었다. 아마 이렇게 급하지 않고 느리게 나아갔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림을 놓지 않고 그린 듯하다. 나처럼 끈기 없는 사람이. 오랜 그림 취미가 되기까지 나만의 속도는 필수였다.

혼자 그림을 그리면서 과연 이렇게 해도 실력이 늘까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기본을 배우고 체계적인 가르침이 있다면 당연히 쑥쑥 늘 것이다. 하지만 상황상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시간을 들이면 실력이 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러니 멈추지 말라고. 천천히 해도 괜찮다고. 나도 그랬으니까. ​


물론 지금 나의 그림들이 객관적으로 잘 그리시는 분들에 비해 대단하다고 말하기에 아직도 부족함이 있다는 건 안다. 그렇더라도 그 간극에 있었던 시간과 나름의 노력이 모두 헛된 건 아니었다. 6년 전 그림과 비교해서 느껴져 그래도 뿌듯하다. 중간에 연필을 들지 않았던 시간들까지도 그림을 계속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안다. ​


직업적인 화가가 아닌 우리는 직장생활도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고 온갖 집안일과 신경 쓸 일들이 많아 취미일 뿐인 그림이 뒷전이 될 수도 있다. 당연히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걸 먼저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생활들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나만의 시간도 가지는 것이 필수다. 그런 시간이 고파지면 그림을 그리자.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생활 가운데 그림 그리는 시간은 분명 자신을 다독이는 귀한 시간이 될 것이다. ​


그리고 싶다면, 그저 끄적이자.

너무 힘주지 말고 매일이라는 틀에 갇히지 말고 그냥 내키는 대로.

그리고 잊지 말자.

지리한 시간도 견디고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도 지나가고 때로는 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 와중에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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