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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Oct 19. 2023

너무 늦은

마지막에 하는 회한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온 산이 하얗게 눈 덮여 있던 그날, 너무나 외롭게 가셨다.


젊은 날 술을 많이 하셨던 아빠는 나이가 드시면서 건강이 극도로 안 좋아지셨다.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는 거의 못 움직이셨고 결국 침대에 누워 지내실 수밖에 없었다. 전혀 자력으로 움직이지 못하시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을 가시거나 목욕을 했다. 결국은 대소변도 자리에서 받아내야 할 정도로 상태가 더 안 좋아지셨다.​​​​

갑자기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놀라서 부랴부랴 내려가니 중환자실 앞에서 엄마가 기다리고 계셨다. 동생들도 벌써 와 있었다.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지셨단다. 의사도 고비가 있을 수 있다고 해서 며칠 동안 조마조마하며 지켜보았다.

면회시간이 되어 들어가 뵌 아빠의 모습은 정말 제대로 볼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주렁주렁 약재들이 달려 핏기도 기름기도 없는 팔에 꽂혀 있었다. 영양제는 코를 통해 들어가고 음식이 언제 들어가 봤는지 모를 아빠의 입술과 혀는 가뭄 들어 쩍쩍 갈라진 논바닥 같았다. 슬쩍 손을 대 만져보니 딱딱한 돌덩이였다. 손을 잡으니 전혀 반응이 없으셨다. 울컥 눈물이 났다.

  ‘아빠, 저 왔어요…….’

그래도 잘 버티신 아빠는 다행히 조금 나아지셔서 2주 만에 중환자실을 벗어났다. 이만해도 어디냐 하며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내내 병원에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미안하지만 요양병원으로 옮기자고 하셨다.

눈이 무척이나 많이 오던 날이었다. 미리 알아보았던 근처의 요양병원으로 옮겨드렸다. 아빠는 요양병원에서 나온 응급차를 타고 이동하고 그 뒤를 엄마와 내가 따랐다. 병실의 침대에 누운 아빠를 보니 조금은 안정된 모습이었다. 요양사분들도 걱정하지 마시라고 잘 모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조금 놓여 밤 운전으로 다시 집으로 올라왔다.

다음 날, 피곤했는지 늦잠을 잤다. 전화벨이 울리고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누나……. 아빠가…….”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어제 분명 내가 요양병원에 모셔다 드렸는데,  건강 검진하셨던 의사 선생님도 걱정하지 말라 하셨는데, 침대에 누우신 아빠의 표정도 생각보다 편안해 보였는데, 그런데, 그런데…….


멍하게 어찌할 줄을 몰라 허둥지둥하다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화장대 앞에 섰다. 아무 소리도 못 하는 나를 보고 남편이 오더니 그냥 안아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펑펑 울었다.

내려가는 길의 하늘은 어찌나 파랗던지. 어제까지 그렇게 눈이 내리던 날처럼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 심정지가 왔다고 했다. 가장 가까이 사는 동생에게 연락이 왔지만, 가족들이 서둘러 갈 때까지도 못 기다리시고 돌아가셨다. 곁에 아무도 없이 외로운 시간에 그렇게 급히.

아프고 맘대로 못 움직이시는 육체 속에서 이젠 자유로워지셨겠지, 편안해지셨겠지 위로를 해보지만 장례 치르는 동안, 절하는 동안 울면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아빠, 미안해…….’였다. ​워낙 무뚝뚝한 딸인 데다가 어려서부터 타지 생활을 한지라 따뜻한 말 한마디도 못 해드렸다. 돌아가시기 전에도 안타까운 마음에 손만 잡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의식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청력은 마지막까지 남아있다고 하던데 아무 말도 못 해 드렸다.

​​​

엄마는 그래도 할 만큼 다 해주었다며 후회가 없다고 하셨다. 안타까운 인생,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돌아가신 게 오히려 잘 된 거라고 애써 말씀하셨다. 말씀은 그리 하셨지만 내내 한숨을 내 쉬셨다. ​


아빠가 돌아가시고 3주가 지났다. 사후 처리를 위해 인감증명서를 동생에게 보내야 했다. 서랍장을 뒤져 그동안 쓸 일이 별로 없었던 인감도장을 가지고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라 그런지 민원인들이 제법 있었다. 의자에 앉아 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들려 있는 인감도장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도장에 비하면 참 작았다. 막내 아이의 손가락 같다. 아빠가 초등학교 때 만들어 주신  나의 첫 도장이었다. 그걸 인감도장으로 30년 넘게 쓰고 있었다. 하도 오래 써서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한참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눈이 뻐근해지면서 가슴이 조여왔다. 슬픔은 이렇게 작은 틈이 보일 때 문득문득 오는 듯했다.

나보다 부모님 두 분을 모두 보내신 지인이 위로해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살면서 문득문득 더 떠오를 거예요. 더 힘들어질지도 몰라요. 저도 그랬거든요…….”

​정말 그랬다. 왜 돌아가시고 나서야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지. 돌아가시고 나니 자꾸 예전 생각을 하게 되었다.


멍하니 앉으니 아빠와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저 가까이 가기 어렵고 무섭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아빠였다. 생각해 보면 내가 깨우치지 못한 사이에 은근한 사랑의 표현을 해주셨다. ​대학 때 연탄불을 피우던 자췻집에 연탄이 떨어져 연락드리면 친구분에게 용달차를 빌려 충주에서 청주까지 직접 연탄을 갖다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자췻집 근처 연탄집에서 주문하면 되는데 굳이 그렇게 하셨다. ​용돈이 떨어졌다고 연락드려 통장을 확인해 보면 항상 말했던 금액보다 더 많이 보내주셨다.

 전액 장학금을 받은 통장카드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결국 못 찾았다. 게다가 통장에 잔고가 십 원 단위만 남고 인출되었음을 알고 하늘이 노래졌다. 너무 속상한 나머지 한참 동네를 돌아다니다 어쩔 수 없이 아빠께 전화했다. 우물쭈물 울면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빠가 줄게.”

단 이 말만 하셨다. 아무것도 자세히 묻지도 않으셨다. 죄송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섞여 그렇게 한동안 공중전화박스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때는 왜 그 마음을 몰랐을까, 돌아가시고 난 이후 소가 되새김질하듯이 자꾸 아빠와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렇게 아껴주셨는데 그걸 몰랐다. 참 어리석었다. ​미국의 목사이자 노예 폐지 운동가였던 헨리 워드 비처는 우리가 부모가 됐을 때 비로소 부모가 베푸는 사랑의 고마움이 어떤 것인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아빠의 사랑을 바보같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깊이 알게 되었다. 내가 부모로 익어가면서 더욱더 느낀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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