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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Oct 25. 2023

너 때문에 살았다

나는 대금을 좋아한다. 잘하지 못하면서도 연주하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진다. 시작이 위로여서일까. 어쭙잖은 솜씨로 대금을 연주하는 소리, 그 시간 자체로 좋다. 잘 연주하지는 못하지만 대금을 처음 만나던 당시, 나에게는 숨통을 틔게 한 약이었다.


그때는 가슴 답답했던 날들의 반복이었다. 방과 후까지 내내 아이들의 생활지도로 진이 빠졌다. 1학년 담임이었고, 다툼은 부모로 이어졌고, 쏟아지는 부장 업무는 상황을 봐주지 않았다. 에너지가 바닥까지 소진되면서 점점 의욕이 사라졌다.


유시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라고 했다.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려는 의지이자 권리란다. 해야 할 일에만 묻혔다는 건 자기 결정권이 박탈당한 상태다. 난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매몰되어 무기력을 느낀 것이다.


‘아, 정직한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

내가 한 만큼, 하지 않은 만큼 그대로 나오는 정직한 결과를 느끼고 싶었다. 다른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나의 의지와 행동으로 결과가 나오는 것, 나만이 오롯이 통제 가능한 능력과 노력만큼의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것. 나를 살려야 했다.


예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대금이 생각났다. 마침 가까운 문화센터에 강좌가 있어서 얼른 신청했다. 첫날, 강의실을 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폐강되려다 가까스로 살아난 강좌, 그 유일한 수강생이 나였다.


대금 배우는 과정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막아야 할 구멍은 지나치게 넓었고 내 손가락은 짧았다. 손가락에 경련까지 났다. 처음 배운 음이 곱게 소리 나는 데도 한참 걸렸다. 연습하지 않으면 제자리는커녕 되던 것도 안 됐다. 꾸준히 하면 쥐꼬리만큼씩 늘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좋았다.


조금은 더딘 진도였지만 정직하게 천천히 가고 싶었다.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만 나아가는 충만함을 느끼고 싶어 서두르지 않았다. 연습을 하지 못한 날도 많았고 오랜만에 불다 입이 굳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적어도 내 통제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었으니까.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죽어도 안 나던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수시로 입 모양이 달라져 힘들었던 호흡이 조금씩 잡혀갔다. 가장 어려웠던 낮은 소리도 곱게 나기 시작했다. 최고의 기분이었다. 음이 안정되면서 곡도 연주하고 타령이나 민요도 제법 부를 수 있었다. 드디어 정악곡도 시작했고 낯선 음들이 익숙해지면서 한두 곡 정도는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대금 배우기를 잠시 쉬고 있지만 가끔씩 꺼내 그 시간으로 돌아가 본다. 잘 불든 못 불든 그 시간만큼은 마음이 충만해지고 위로가 된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하리라 다짐하곤 한다.


요즘 읽고 있는 <마음의 법칙>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불행을 느끼는 여러 원인 중 동일한 요소는 자신의 인생을 다스릴 통제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라고 한다. 바로 자기 효능감이 떨어진 것이다. 내 삶인데 내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상실감을 느낄 때 얼마나 불행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가. 그래서 작은 변화라도 스스로의 인생에 만족감과 자신감을 넣어줄 내 인생의 통제권 회복이 필요하다.


밀려 사는 듯한 느낌은 무기력함과 허무함을 가져온다. 나 자신의 균형이 무너질 때 나만의 통제 가능한 경험이 필요하다. 잘 놀아야 잘 일할 수 있다고 했다. 자기 결정권이 있는 활동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그 힘으로 일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 업무와 상관없는 취미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많은 이유이지 싶다.


슬럼프였던 힘든 시기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와준 대금을 나는 사랑한다. 멋진 대금 연주곡을 들으면 잘 모르면서도 설렌다. 대금을 보고 만지는 것만으로 그 시절 애틋했던 나에게 위로가 된다. 언젠가 대금 하나를 들고 여행을 하며 멋진 청소리로 연주하는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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