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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Oct 27. 2023

산책의 이유

나는 산책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특히 혼자 하는 산책을 좋아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걷기 운동이 아니라 산책이다. 옛날 선비들이 뒷짐을 지고 팔자로 천천히 걷듯 여유롭게 산책하는 것을 즐긴다. 설렁설렁 걸으며 잠시 멈춰 주변 풍경도 보고, 마음에 들어오는 장면은 사진도 찍고, 네잎클로버도 찾고.


소소하게 일상을 남기는 내 블로그에서 ‘산책’ 키워드로 찾아보니 거의 200개 가까이의 게시물이 있었다. 들꽃 사진 찍으며 걷던 산책, 딸과의 산책, 하늘, 풍경, 노을, 네잎클로버 찾느라 한참 멈추던 산책, 눈 내린 날, 비 오는 날, 속상한 날에 무작정 20킬로미터를 걸었던 산책, 밤 산책, 새벽 산책, 가을 산책, 우울한 날의 산책, 생각이 많은 날 정리를 위한 산책, 봄의 산책, 여행 가서 한 산책, 장보기 겸 산책, 결혼식장 근처 산책, 주말 산책, 사진 산책 등 참 다양하게 산책했다.



서늘하면서도 따스한 햇살이 머리 위로 스치는 이른 새벽의 산책은 생명이 피어오르듯 상쾌하다. 다들 잠들어 있는 세상에 나 홀로 깨어 생기 있는 느낌이다. 이슬사이로 채도가 높아진 풀들과 저 멀리 떠오르는 햇빛의 반사로 노란빛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먼 산의 따사로움도 좋다. 이런 때면 나는 음악도 듣지 않고 모든 감각을 열어 그대로 오감을 느끼며 산책을 한다.


밤산책은 그 나름대로 좋다. 시각이 어느 정도 차단되는 대신 머릿속을 탐험하며 산책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시각정보가 들어오는 낮보다 생각에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다. 복잡하고 속상한 마음이 풀리도록 기다려주며 천천히 걷는 산책이 제격이다. 먼 곳의 불빛에 집중하며 한 바퀴 돌면 어느새 고민은 절반 정도 날아가 있다.


산책은 걷기와 다르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산책은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을 의미한다. 산책은 천천히 걷는 것이다. 걷는 행위보다 좀 더 여유롭다. 목적지를 향한 조바심 나는 걸음이 아닌 즐기는 과정의 걸음이다. 속도를 늦춰야 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산책은 사색이다. 이원흥 님의 책 속에 나온 이 문구는 정말 찰떡처럼 설명한다.



책 중의 책은 산책이다.
어떤 산책은 모든 책보다 낫다.
나를 들여다보는 데에는 산책만 한 ‘책’이 없다.

이원흥 <남의 마음을 흔드는 건 다 카피다>중에서



산책하면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통찰에 이르기 위한 여정을 함께 간다. 그래서 산책을 하고 나면 뭔가 모르게 머릿속이 개운해진다. 소가 낮동안 들에서 먹었던 풀들을 외양간에 돌아와 되새김질하듯이 인풋 된 정보와 자극들을 다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반추하는 시간인 것이다. 산책은 공간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한 생각들을 다듬고 정리하는 과정이다. 어떤 연수나 배움 못지않게 나에게 깊이를 더해준 최고의 선물 중 하나였다.


홀로 하는 산책을 강추한다. 지루하다 싶다가도 어느새 주변 풍경에 빠지고 감탄하고 때로는 자기 생각에 빠져 지나온 길들이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되었든 나를 사랑하고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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