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론 Oct 28. 2023

그린다는 것


그림은 손이 아닌 눈으로 그리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관찰이 전부라고 했다.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손이 아닌 입으로도, 아니 발로도 그리는 분들이 계신다. 그림은 대상에게 다가간 시선의 흔적을 손으로 남기는 작업이다. 그림은 눈에서 시작해서 눈으로 끝난다.


그림은 재발견이다.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길가의 풍경을, 좋아하는 대상을, 때론 속상한 마음을 담은 감정을,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절을 천천히 돌아보고 바라본다. 그리고 그 순간의 마음을 그린다.


나에겐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이자 몰입의 극치였다. 그림에 몰입하고 순간에 집중하면 어느새 완성된다. 시작하기 전 결과물을 예상하고 그리는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완성하기 전까지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나조차 모르는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 그저 그리는 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저 그런 날들도 누군가가 그리도 바라는 평범한 일상임을 알고 나면 귀하게 느껴진다. 지나치는 일상을 그림을 통해 다시 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행복한 순간임을 연필 끝에서 붓끝에서 느낀다. 그림을 통해 나는 사소한 일상을 다시 한번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 그 자체도 행복이다. 지치고 힘들 때도 우선 연필을 든다. 몰입하며 나만의 고요를 느낀다. 나는 그때마다 행복했다.


그러면서 모든 그림을 존중하게 되었다. 낙서처럼 보이는 그림도 그 자체만으로 귀하다. 그 과정의 이야기를 사랑하게 된다. 지우개를 쓰지 않은 날것의 그림도 좋다. 정답을 벗어난 선을 지우기보다 모든 선을 허용해도 괜찮다는 여유가 좋다. 그렇게 나온 그림이 모두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림을 선물하는 마음에 담긴 깊이와 특별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부탁한다고 쉽게 선물로 주지 않았다. 뭐 대단한 작품도 절대 아니지만 그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에 그 마음이 충분하지 않으면 전하지 않았다. 이건 나의 마음을 지키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린다는 것>의 노석미 작가는 그린다는 것은 끝이 어딘지 모르는 길을 계속 ‘걸어가기’와 같다고 했다. 걸어가는 과정에 비유한 점은 나도 같은 생각이다. 산책을 하며 주변을 관찰하고 감탄하고 멈추듯이 그림의 과정을 천천히 즐기다 나의 시선이 새롭게 바뀌어 가는 모습이 좋다.


그림을 재능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도 산책하듯이 낙서처럼 시도해 보면 좋겠다. 산책의 목적이 도착이 아니듯 그리는 과정에 숨어 있는 더 많은 축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실력과 무관하게 많은 선물을 안겨 줄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게 그림이 있어 다행인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산책의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