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사람들 일대기 6편
혜선은 남쪽의 큰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였다.그는 이 도시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고, 그 점에 대해선 별다른 아쉬움이 없었다. 말은 제주로 가고 사람은 서울로 간다지만, 그에게는 익숙하고 평온한 일상이 더 소중했으니까. 그는 법대를 나왔다. 붉은 벽돌 건물 안, 도서관 책상마다 불빛 아래 밤을 새우는 얼굴들이 있었다. 혜선도 그들 중 하나였고, 그 옆엔 1학년 때부터 만난 연인이 있었다. 그들은 가끔 서로가 함께 하는 먼 미래의 풍경을 조심스레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혜선만 고시에 붙고, 그의 연인은 낙방을 거듭하면서 그 풍경은 점차 멀어졌다. 때로는 한 점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 사랑도 있다는 걸, 그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이별은 조용히 이루어졌다. 그 무렵, 생명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결정을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고민한 끝에, 그는 혼자 자식을 낳아 키우기로 했다. 혼자서라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삶도 괜찮아 보였다. 태생적으로 밝고 명랑했기에, 병원에서도 금세 엇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다른 산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실의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특히 같은 병실을 쓰던 수애에게 친절히 말을 걸었고, 특유의 정겨운 말투와 밝은 웃음소리는 출산을 앞둔 수애의 긴장감을 덜어주었다.
혜선은 도시 외곽의 한적한 곳에 작은 마당이 딸린 2층 짜리 주택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윗층은 비어 있었고, 병실에서 인연을 맺은 수애와 산 부부가 그곳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두 가족은 그렇게 한 집에서 함께 아이들을 키웠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나누는 소소한 대화와 마당에서 함께 어울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 집을 따뜻하게 채웠다.
어느 날은 수애가 말없이 반찬 한 통을 계단에 놓고 갔고, 어느 날은 혜선이 수애의 아이를 잠시 봐주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크게 나누지 않았지만,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삶의 결은 누구보다 서로 잘 알고 있었다. 마당에서 마주칠 때마다, 혹은 늦은 밤 계단에서 불을 끄고 돌아서는 순간마다, 둘은 짧은 말을 주고받았다. 오늘도 나이트이신가요, 애들은 잘 자던가요. 혜선은 수애의 고단한 걸음걸이에서, 수애는 혜선의 조용한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혼자서 다 감당하려 하지 않아도 돼요” 같은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초봄의 바람이 살며시 불어오던 날, 작은 마당 한켠에는 아이들을 위해 친 조그만 텐트가 있었다. 곧 텐트 밖으로 튀어나온 아이들은 마당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고, “잡아 봐!” 외침과 함께 돌고래 웃음 소리가 바람에 실려 하늘로 날아갔고, 잔디 위를 종종거리며 오가는 작은 발자국들이 남았다. 조금 비껴선 평상 위에는 산이 술 한 모금과 함께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혜선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정장을 벗고 담요를 무릎에 덮은 채, 그녀는 산의 말을 들으며 가끔 눈웃음을 지었다. 우체국, 그리고 법정.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같은 공간에서 평온한 순간을 공유하며 마음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훗날 두 가족은 다시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혜선은 가끔 수애가 두고 간 화분을 바라보며 그들과 함께 지냈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는 가끔씩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그들이 행복하기를 빌었다. 어디에서든.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 아래, 판결문 초안을 검토하는 손길은 한결 같이 차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