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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 증언 위의 놀이터

바닷가 사람들 일대기 8편

by 신서안 Mar 20. 2025
사진: Unsplash의 Kenny Eliason사진: Unsplash의 Kenny Eliason



자식 버리고 도망친 사람,  

총칼 아래 이름도 없이 쓰러진 사람,  

그 뒤로 돌 하나 남았을 뿐이더라.  


울며 떠난 자 있었고  

묻고도 말 못한 이 수두룩하니  

돌 하나 남아 세월을 견디었다.  


어린 것들 웃으며 그 위를 지나고  

말라붙은 꽃 하나 조용히 올려두매  

그 무지함이 복이요, 아픔이로다.  


묘비는  오늘도 말없이 증언한다—  

그 누구도 듣지 못한,  

그러나 잊히지 않은 이야기들을.  






미술학원의 작은 창으로 늦여름의 더운 바람이 들어왔다. 인석은 나른하게 어깨를 폈다. 그는 천천히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자, 오늘은 너희가 제일 좋아하는 걸 그려볼까?”



아이들은 신나게 크레용을 집어들고 캔버스에 달려 들었다. 흰 종이 위에 삐뚤빼뚤한 선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인석은 뒷짐 지고 다가가 그림을 살폈다. 강은 나무와 꽃, 해무와 해수는 바다와 물고기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인석의 눈에 기묘한 것이 들어왔다.



아이들의 그림 한 귀퉁이에, 희미하게 서 있는 네모난 돌덩어리가 있었다. 세 그림 모두에. 그것은 누가 봐도 묘비였다. 인석은 의아한 마음에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건 뭐니?”


“묘비요.” 해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묘비를 너희가 본 적 있니?”


“그럼요. 자주 놀러 가는 데 있는데요.” 강이 대답했다.



인석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그 형태가 그의 마음을 붙잡았다.



“거기가 어딘데?”


해수가 손가락으로 창밖 먼 곳을 가리켰다.



“언덕 넘어 저쪽이에요. 우리만 아는 비밀 장소예요.”



수업이 끝난 뒤,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인석은 곧장 그 언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성한 풀숲을 헤치고 들어서자 뜻밖의 풍경이 펼쳐졌다.



잡초로 뒤덮인 황량한 공터. 그 한가운데 반쯤 땅에 묻혀 드러난 낡은 묘비 하나가 서 있었다. 인석은 가만히 다가가 그것을 살폈다. 희미하게 닳아 없어진 일본인의 이름과 연도가 간신히 보였다. 주변에는 떨어진 열매와 나뭇가지가 바닥에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아이들이 놀았던 흔적이었다.



이 낯익은 장소는 그의 오래전 기억을 불러냈다. 어릴 적, 부모와 살던 쥐가 나오는 오래된 집. 그리고 부엌 아궁이 앞에 묻혀있던 낡은 묘비 하나. 어릴 때는 그저 돌덩이로 여겼던 그것이 어느 일본 사람의 묘비라는 것을 인석은 나중에야 알았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그는 천천히 묘비 곁에 앉아 손으로 돌 표면을 어루만졌다. 차갑고 거친 감촉이 손끝을 따라 퍼졌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아이들은. 왜 하필이면 이 묘비였을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묘비와 자신, 그리고 아이들이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그를 감쌌다. 해질 무렵의 따스한 빛이 풀잎을 스쳤다. 인석은 천천히 일어나 언덕을 한번 돌아보았다.






혜선의 집 주변에는 놀잇감이 많았다.

강과 쌍둥이는 빗물이 고였다 빠진 자리에서 발끝으로 조약돌을 뒤적였다. 돌무더기 사이에 작은 묘비 같은 게 있었고, 그 앞에는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꽃 하나가 말라 있었다. 이름도 없고, 표시도 없는, 아이들 말처럼 ‘아무한테나 만든 무덤’이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곧 아이들은 거기에 자신들만의 의식을 덧붙였다. 누군가는 죽은 금붕어를, 누군가는 쪽지를, 또 어떤 날은 작게 접은 종이비행기를 묻었다. 장난처럼 시작된 일이었지만, 어느새 그곳은 아이들의 속마음을 담아두는 장소가 되었다. 학교에서 혼났을 때도, 엄마가 너무 피곤해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도, 아이들은 언덕배기 그 조약돌 앞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남기고 돌아갔다.



인석이 우연히 다시 본 것은 바로 그 묘비였다. 이 도시를 떠나겠다 마음먹은 열세 살 즈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무언가를 묻고 돌아섰던 곳. 잊은 줄 알았던 그 묘비는 그 열세 살짜리 소년이 늙어 노인이 될 때까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날 묻었던 자신의 비밀은 이미 사라졌겠지만.



“오래 기다렸구나.”



인석은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다시 언덕을 내려갔다. 그는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이 묻힐, 오래된 기억과 새로운 이야기가 함께 잠들어 있는 그 자리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자식 버리고 도망친 사람,  

총칼 아래 이름도 없이 쓰러진 사람,  

그 뒤로 돌 하나 남았을 뿐이더라.  


울며 떠난 자 있었고  

묻고도 말 못한 이 수두룩하니  

돌 하나 남아 세월을 견디었다.  


어린 것들 웃으며 그 위를 지나고  

말라붙은 꽃 하나 조용히 올려두매  

그 무지함이 복이요, 아픔이로다.  


묘비는  오늘도 말없이 증언한다—  

그 누구도 듣지 못한,  

그러나 잊히지 않은 이야기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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