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시대가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21세기
허나 들끓는 감정에 붙여줄 이름 없는 답보의 시대
이 뜨거운 심장의 뜀박질에 이름 붙일 생생한 이름표 하나가 없다.
사랑 우정
그런 흔한 그릇에 우리가 담길 수 있을까.
01
그런 날이 있다. 뭘 해도 안 되는 날. 인생은 본디 잘 풀리는 날보다 그럭저럭이거나 그 이하의 하루들이 더 많은 법. 사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올라와 엑셀과 씨름한지 어언 두시간 째. 수식이 먹히지 않더니 이내 저장하지 않은 엑셀 프로그램이 멈춘 바로 그때. 희재 핸드폰 액정이 반짝였다. 추자에게서 온 전화였다.
희재는 손에 핸드폰을 쥐고 사무실을 휙 돌아봤다. 듬성듬성 노란 스탠드 불빛 켜진 파티션들이 보였다. 찰나의 고민 끝에 희재는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3초도 되지 않아 다시 추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더 빠르게 거절 버튼을 눌렀다. 아직 회사라고 메시지를 보내려던 그때. 추자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얘가 왜 이래?
평소답지 않은 추자의 끈질김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주 예전 같았음 추자의 이런 연락에 심장이 덜컹했을 거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겐 심장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칠 문제는 없다. 희재는 핸드폰을 들고 느린 걸음으로 휴게실로 갔다. 추자에게서 네 번째 전화가 울리는 중이었다.
“응. 여보세요. 나 아직 회사라….”
“지금 당장 고욱현 인스타 라이브.”
“뭐? 누구?”
대뜸 추자가 뱉어내는 낯선 이름을 단박에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 당장 고욱현 인스타 라이브 켜라고. 당장. 지금. 빨리.”
전화는 추자다웠다. 용건만 간단명료하게 남기고 끊겼다.
곧이어 추자는 메신저로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낯선 인스타그램 계정 링크였다. 고욱현. 희재는 팔로우한 적도 없는 대한민국의 랩퍼였다. 희재는 단언컨대 살면서 단 한번도 랩퍼를 사랑한 적 없다.
고욱현, 그는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던 시즌 10기 출연자였다. 이제 시즌을 마무리할 때가 됐다는 악평이 줄줄 달리는 프로그램에서 마지막회 생방송까지 가지도 못했다. 재미도 감동도 못 잡고 중간 탈락했다. 고욱현은 인기도 실력도 모든 것이 지지부진 애매모호했다. 프로그램이 종영하고 세상을 향한 난잡한 디스로 버무려진 앨범을 냈고 처참히 망했다. 희재는 힙한씬에 전혀 관심이 없어 이런 가십엔 무지했다.
하지만 지금 추자가 보낸 링크를 누르는 심장이 은은하게 뛰기 시작했다. 불안을 감지한 특수한 촉수였다. 좋은 예감은 언제나 빗겨가도 불운의 먹구름은 살갗을 스치기만 해도 현실이 된다. 희재는 차분히 자리로 돌아가 줄이어폰을 챙겼다. 본능적으로 사방 뻥 뚫린 휴게실이 아닌 여자 화장실로 걸어갔다. 한 손으로는 베베 꼬인 줄 이어폰을 풀고 다른 손에는 고욱현의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재생 중인 핸드폰을 꼬옥 쥔 채였다.
술에 취한 게 분명한 고욱현 얼굴이 액정을 그득 채웠다. 스치듯이 예능 방송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기시감 드는 이목구비. 뺨은 얼큰하고 콧잔등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게 가관이었다. 고작 밤 아홉시 사십분인데 저토록 만취했다. 실타래처럼 엉킨 줄 이어폰은 비협조적으로 안 풀렸다. 희재는 점점 마음이 급해진다. 벙긋거리는 음소거된 고욱현 입술이 뭘 주절대고 있는지 얼른 들어야했다.
“맞춰보라고요! 지금! 내 옆에! 누가 있는지이!”
줄 이어폰을 귀에 꽂자마자 들린 라이브의 소음. 고욱현이 말끝을 값싼 모짜렐라 치즈마냥 주우욱 늘렸다. 동시에 희재는 늘 애용하는 화장실 맨 끝 칸에 들어왔다. 변기 커버를 닫고 그 위에 앉아 문을 잠갔다.
“여러분 안 궁금해요? 내 옆에 퍽킹! 누가 앉아있는지?”
난데없는 욕설이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볼륨을 세 칸 더 키우며 이어폰을 좀 더 쑤셔넣었다. 라이브 방송하는 고욱현은 말할 때마다 영어 슬랭을 섞어썼다.
“여러분이 알면 놀라 나자빠질! 우리들의 히어로! 우리들의 악당! 당신들의 퍽킹 이블! 앤드 쏘 큐트 엔젤이 내 옆에 있다고!”
깔깔 낄낄 고욱현이 숨넘어가게 웃었다. 불길하기 시작했다. <이블>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오늘의 재수 옴 붙은 하루 마무리가 심상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손톱을 조금씩 물어뜯기 시작했다.
“짜라자자잔. 짜 자라자잔.”
수십년 전 신동엽의 러브하우스 테마송을 부르는 고욱현이 핸드폰을 흔들었다. 덕분에 카메라가 흔들렸고 멀미가 났다. 이어폰을 다시 고쳐 꼈다. 그 움직임에 희재 머리 위에서 칙칙 소리와 함께 딸기맛 방향제가 분사됐다.
“한명이라도 정답을 맞히면 제 옆으로 카메라를 사알짝 돌려 지금부터 그 얼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천장에서 누런 미러볼이 돌아가는지 고욱현의 이목구비가 빛났다 사라지기를 수 초 간격으로 반복했다.
“뭐야 용기 없어? 댓글들을 왜 다 안 달아? 당신들 지금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잖아. 퍽킹 솔직해져보라고! 투 비 어니스트! 아냐. 아냐 내가 보여줄게. 집중. 포커스. 한 사람도 방송 나가지 말고 지금부터 잘 봐. 내 옆에 누가 앉아있는지. 너희가 가장 보고싶어하는 이 시대 가장 데드 이블!”
영국식도 미국식도 아닌 괴이한 토종 발음. 카메라 앵글이 서서히 왼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벽지 풍경이 바뀌었다. 심장이 쿵쿵, 쿵쿵쿵, 조금씩 빠른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아 됐어. 치워.”
손바닥을 내미는 누군가가 카메라에 새롭게 담겼다. 희재는 입술을 꽉 물었다. 볼륨을 두 칸 더 키웠다. <너무 높은 볼륨은 청력을 손상시킵니다.> 스마트폰이 다정한 걱정의 팝업을 건네 짜증났다. 청력이고 나발이고 볼륨을 더 키우겠다는 버튼을 황급히 눌렀다.
“어이 봐봐 보여? 댓글로 사람들이 다 네 이름만 부르고 있잖아! 네 이름으로 도배가 됐다고!”
고욱현이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가 송출됐다. 이제 카메라에 명백히 보이는 얼굴은 주희찬이었다. 고욱현과 희찬에게 어떤 접점이 있었던가?
“봐봐 너의 팬들! 너의 팬 천사들에게 한마디 해줘 얼른. 다정한 우리의 이블 희찬!”
고욱현이 놀리듯이 옆에서 낄낄댔다. 주희찬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순식간에 그 시선에 압도되어 입속이 말라붙었다.
“여기 내 이름이 어딨어. 내 이름 하나도 없잖아.”
액정을 쳐다본 희찬이 경멸하듯 말했다. 그 표정이 토시 하나 안 빠지고 고스란히 희재의 눈과 귀에 닿았다. 저토록 차가운 희찬 표정은 처음 봤다. 희재는 입안의 물컹한 살을 깨물었다.
“내 이름 어딨냐고. 다 걔만 찾잖아. 걔 이름밖에 없잖아. 장난해?”
희찬이 검지손가락으로 액정을 슥슥 문질러 댓글창을 훑으며 뇌까렸다. 희찬도 취한 게 분명했다. 희찬 주량은 희재도 잘 알았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테이블에 머리를 쿵 박고 기절하는 애였다. 어렴풋이 보이는 테이블에는 소주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차라리 오늘도 테이블에 머리 박고 잠들어버리지. 그럼 이런 대참사가 안 일어났을 텐데. 희재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봤다. 얼른 이 방송이 꺼지기를 기도했다. 라이브 방송을 종료하라는 똑같은 내용의 댓글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찾아보면 브로, 희찬 네 이름도 하나쯤은 있을 걸?”
“뭐하자는 거냐, 너 지금 사람 속 긁어?”
희찬이 날 선 목소리로 욱현을 노려봤다. 라이브 화면 안엔 희찬만 나왔다. 핸드폰을 든 손은 욱현으로 짐작됐다. 희찬은 불쑥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꼭 눈 마주치듯 희찬이 희재를 봤다.
“걔 어딨냐고 왜 다 나한테 물어?”
밀물처럼 몰려드는 댓글들을 보며 희찬이 시비조로 물었다.
“너네 지긋지긋해서 숨어버렸잖아. 근데 걔 소식을 왜 나한테 묻냐고. 내가 숨겼어? 내가 걔 어따 갖다 버렸어? 왜 다 나한테만 지랄이야.”
마지막 문장과 함께 갑자기 카메라가 위아래로 요동쳤다. 욱현이 ‘웁스!’ 감탄사를 뱉는 게 들리더니 카메라가 우당탕탕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화면이 까매졌다 누래졌다 환해졌다 종국엔 미러볼 돌아가는 천장을 비췄다.
“욕은 하면 안 되지 브로. 지랄이라니. 방송 중이잖아! 이거 내 계정이라고!”
“왜 나만 보면 차연오 어딨냐고 묻고 지랄들이냐고. 내가 걔 시다바리로 보여?”
“연오가 사라졌으니까 그런 거겠지. 브로는 연오 베스트 프렌드잖아.”
“그러니까 걔가 다 지긋지긋해서 세상에서 사라진 거잖아. 애초에 처음부터 지긋지긋해했던 건 차연오인데 왜 나한테 난리냐고. 내가 없앴어? 내가 차연오 없앴냐고. 차연오는 처음부터 아이돌로 사는 거 지긋지긋하게 생각했으니까 어디로 꺼져버린 거겠지. 왜 다 나한테 지랄이야 나만 보면 차연오 타령이냐고. 나도 그 새끼랑 연락 안 해.”
“팬들은 다 연오 걱정돼서 그런거지 브로!”
“팬? 팬 걱정하는 새끼가 저 지랄로 잠수타고 사라져? 니들이 차연오에 대해 알면 뭘 알아. 니들 지겨워하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차연오가 나만 싫어해? 니네를 제일 싫어해.”
미러볼 빙빙 돌아가는 화면과 함께 희찬 목소리가 송출됐다. 그러다 약 10초 뒤쯤, 아래서 올려다보는 욱현의 턱선이 보이더니 라이브 방송이 갑자기 종료됐다.
라이브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희재는 그 글씨를 멍청히 쳐다봤다. 추자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걸쭉한 욕설이 들려왔다.
“나 지금 바로 니네 집으로 간다. 이 미친 새끼들이.”
주희찬과 차연오. 그 사람들은 김추자와 고희재의 20대를 고스란히 함께한 이름들이었다. 그러고보니 꼭 10년 전에, 추자가 저 말을 똑같이 했던 것 같다. 인생은 도돌이표였다. 겪었으면서도 다른 엔딩을 기대하며 처음으로 돌아갔다. 이번 노래는 다를 거란 착각에 빠졌다. 애초에 건반을 누르지 않으면 될 것을, 번번이 똑같은 구간반복이었다. 데자뷰도 이런 악몽의 데자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