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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춤 에테르 8화

by 모정연

예대에서 거의 3km 넘게 떨어진 공학 3관까지 걸어가면서 안일했음을 인정했다. 일단 대학에 간 뒤 꿈을 찾으라던 어른들 말을 순종적으로 들은 결과였다. 엄마 소원대로 공대에 간 이후 생각하자고 유보한 죄였다. 예술대학으로 전과 불가능보다 청천벽력은 타 단과대 학생은 예술대학 어떠한 전공도 청강조차 할 수 없다는 거였다.



희재가 입학한 대학교는 예술대학 명성이 대한민국 최고 수준이었다. 국내에서 예대 전통이 가장 깊었고 워낙 예술 전분야에 걸출한 선배들이 많았다. 선배들이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학교를 알렸다. S대 예대 출신. 그것이 주는 이미지. 해당 전공사에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시대를 앞서나가는 감각을 보유한 천재. 그것이 희재 발목을 콱 붙든 것이다. 다른 학교에 비해 너무나도 예대 명성이 높은 학교라는 것. 그러니 학교 내에서 예대 입지가 높았고 예대에만 통용되는 이례적 학칙이 많았다. 다른 학교에는 없는 학칙이 예대에서는 통용됐다. 공대에도 인문대에도 없는 학칙이 예대에만 존재했다.



S대 예대는 원래 전과가 안 되나요, 역사상 단 한명도 못 했나요, 지식인에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조교 언니가 또 창백한 얼굴로 달려와 ‘입학처에 이미 써있어요.’ 답글을 달까봐서였다.



멀미나게 오래 걷자 공학 3관이 나왔다. 가장 꼭대기 층으로 갔다. 거기 B07호가 있다. 보통 호수 앞에 ‘B’를 붙이는 건 반지하란 뜻이다. 그런데 3관 꼭대기 11층 남동쪽 맨 끝에 처박힌 폐교실에는 B07명패가 붙었다. 은밀히 추측해보건대 지하 7호실에서 쓰던 문짝을 꼭대기층에 옮겨 단 건 아닐까. 상상력이 거기까지 발동되자 이 공간이 좋아졌다. 친구들을 피해 제발 혼자 밥 먹을 공간이 없을까 공학관을 헤매다 발견한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었다. 먼지로 뒤덮여 아무도 찾지 않는 반지하 문짝 너머의 방. 아지트가 되기에 충분했다.



부옇게 번지 쌓인 교실은 뷰가 죽였다. 왜 여기서 수업을 안 하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탁 트인 유리창을 열면 아직 찬 봄바람이 밀려들었다. 학교 운동장부터 공대 아래 내리막으로 타대학들이 훤히 내다보였다. 가장 먼 예대 건물도 저 끝에 보였다.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오늘은 예대가 멀어 보였다. 책상에 걸터앉아 밝게 빛나는 ‘예술대학’ 단과대 꼭대기 간판을 바라보자니 서글펐다. 희재는 이어폰에서는 슬픈 노래가 흘러나왔다. 원래는 B07호에 오면 스피커로 크게 음악을 틀고 케이팝을 듣곤 했지만 오늘은 특별히 슬픈 날이니 이어폰으로 집중하고 싶었다. 슬플 때 슬픈 노래 듣는 건 희재 취미였다. 슬픈 노래에 과몰입하기 위해 가끔은 아주 슬픈 상황이 필요하다고 생각도 했다. 오늘은 그 취미에 딱 어울리는 날이었다.



엄마 소원인 공대에 입학해 희재 소원인 문예창작과로 전과하는 꿈 달성 시나리오를 위해서라면 S대학이 적격이었다. 일단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 전공을 바꾸는 것 정도는 엄마를 설득하고 협상할 수 있을 거라 얄팍하게 생각했다. 이건 예견된 불행이었다. 입학할 학교 학칙을 잘 찾아보지 않은 죄였다. 사실 꿈을 언젠가 이뤄야겠다며 미루고 미룬 것이 대참사를 부른 건 아니었을까? 꿈을 이룰 자세가 안 된 것 아닐까? 재능도 쥐뿔 없는 주제에 노력 없이 문창과로 가려는 태도가 문제 아닐까? 누구에게도 문창과를 가고 싶다고 말 한 번 못 꺼내보고 은밀한 꿈으로만 간직했기에 ‘S대는 예대로 전과가 안 돼’ 충고조차 듣지 못한 것이다.



해체한 프로스타스의 마지막 앨범 마지막 트랙, 이별을 암시하는 멜로디와 가사가 나왔다. 게다가 프로스타스까지 사라진 세상. 거짓말처럼 눈물이 났다. 어쩌면 문창과가 아니고 슬픔에 몰입하는 재능으로 배우가 더 잘 맞는 게 아닐까? 그때 푸스스 교탁 쪽에서 부스럭 기척이 났다. 어둠의 실루엣이 움직였다. 그것이 안경에 반사돼 얼핏 시야에 들어왔을 때 희재는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눈에서는 진주 같은 눈물이 턱 끝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입이 벌어졌지만 아무 소리도 못 나왔다. 이어폰을 빼자 프로스타스 고음이 먼지 쌓인 공간을 채우고 뻗어나갔다.



“뭐야?”



자다 깨서 퉁퉁 부은 눈과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이 서로를 경계하며 물었다. 그것이 공찬과의 먼지 날리는 스무살 첫 만남이었다.



공찬은 하늘이 보내준 구세주였다. 희재 역시 하늘이 공찬에게 보내준 구세주였다. 둘 다 학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의 신입생이었다. 애초에 각자의 과 사람들과 성향이 안 맞았다. 그들과 같이 그 전공으로 4년 뒤 졸업해 밥 벌어먹고 살 생각이 없었다. 희재가 동기들에게 맘을 못 붙이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들이 그리는 미래가 희재에겐 와닿지 않았다.



공찬은 희재가 갖고 싶은 비슷한 전공을 하는 친구였다.

희재는 공찬이 갖고 싶은 전공을 하는 친구였다.



공찬은 희재가 동경하는 문창과와 닮은 국어국문학과 신입생이었다. 공찬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건 마크 저커버그 같은 감성과 기술을 잇는 최첨단 IT 기술 CEO. 희재가 존경하는 건 인생의 희로애락을 활자로 노래하는 은희경 양귀자 작가님이었다.



공찬은 공대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수리가형의 벽을 못 넘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고등학생 때 이과인데도 수리나형을 치고 교차지원을 통해 S대학 국문과에 입학했단다. 이과지만 수리나형으로 돌리고 공대를 가는 방법도 있겠으나 부모님이 교차지원을 통해서라도 S대학에 입학하라고 압박했단다. 희재와는 정 반대 경우였다. 희재는 수학만 잘했다. 고1 때 사탐은 9등급을 찍어 담임을 기함하게 만들기도 했다. 유일하게 1등급 찍는 건 수리뿐이었다.



“얘는 이과에 가야해요. 이건 어떤 면으론 선택받은 거예요.”

고1 때 담임은 학부모 상담 때 희재 엄마를 이과에 매혹시켰다.



대입도 취업도 남들보다 빠른 코스로 척척 이룰 수 있다는 그 말에 희재 엄마는 좋아했다. 희재 의지와 무관하게 이과 가는 게 기정 사실화됐다. 가고 싶지도 않은 인생을 빠르게 뛸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희재는 누구에게도 무얼 전공하고자 하는지 말하지 못했다. 꿈에 솔직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말했다가 ‘너 같은 게 무슨 글을 써?’ 무시당하기 싫어 회피했다. 최대한 용기를 내고 고2 막바지에 문창과 입시를 하려면 무얼 해야 하냐고 담임에게 갔을 때, 헛소리 말고 과탐 점수나 더 올리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글은 대학에 가서도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본인과 타협했다. 일부러 수학만 못해볼까 고민했지만 잘 안 됐다. 무슨 짓을 해도 전과목이 수리만큼 늘지 않았다. 이 기묘한 부조화 속에서 결국 이과에서도 계속 계속 수학만 잘했다. 계속 계속 수학만 잘했으므로 내신의 영어 국어 점수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얘는 정시형 학생이에요. 수리가형 1등급은 대학 자유이용권이에요.”



고3 담임은 그런 식으로 희재 엄마에게 희망을 심어줬다. 그 자유이용권으로 입학하니 예대에 발자국 하나 들여놓지 못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자유이용권이란 말인가!



“나 너희 과 복수전공 하고 싶어.”

공찬의 눈이 반짝였다.

“나도!”

희재 눈도 반짝였다.



국문학과 공찬과 컴퓨터공학과 희재가 절친이 되는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고작 둘 뿐이긴 했지만, 학교 앞 소음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버거킹에서 도원결의를 했다.



“여기 노래가 좋네!”

햄버거로 기분 좋아진 희재가 감탄했다.

“가요 좋아해?”

공찬의 물음에 희재가 파하하 크게도 웃었다.



“가요라는 말 너무 올드해. 케이팝이라고 해줄래?”

희재의 정정에 이번엔 공찬이 크게 웃었다.

“응, 케이팝 좋아해?”

“환장해.”



희재 대답에 공찬이 감자튀김에 케첩을 푹 찍으며 끄덕였다. 특이할 게 없었다. 케이팝은 20대의 주류 문화 중 하나였다.



“너는 케이팝에 관심 없어? 국문학과잖아. 문과 애들은 낭만이 있지 않나? 유행가, 베스트셀러 같은 것들에 제일 빠르게 반응하지 않아?”



늘 문과생에게 이상한 편견과 야릇한 기대가 많았다. 절친 추자마저도 이과였기 때문에 희재는 문과 친구가 거의 없었다.



“음. 그냥. 나는 사실 깊게는 잘… 몰라서.”

공찬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작게 실망할 뻔했다.



“안 좋아하지는 않아. 환장하지 않는다는 거지.”

얼른 희재 말을 빌려와 해명하는 공찬의 말투는 느렸고 고양이가 눈 끔뻑이는 것처럼 어떤 말이든 잘 들어줬다.



잘 들어주는 사람 앞에서 빠르게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또 희재의 재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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