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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춤 에테르 9화

by 모정연

그들에게는 엄청난 교집합이 있었다. <어떤 걸>할 때 잠을 안 자고 밥을 안 먹어도 피곤과 허기를 안 느끼고 완벽히 몰입하는지 알았다. 공찬은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그렇다고 했다. 코딩도 마치 새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아 재밌다고 했다. 세상에 없던 서비스 만드는 것만 생각하면 피가 끓는다고 했다. 희재도 마찬가지였다. 소설만 쓰면 시간이 훌훌 잘도 갔다. 태어나 아무에게도 글 쓰는 취미가 있다고 말하지 않은 희재였지만 공찬 앞에서는 말이 술술 나왔다. 희재는 이 취미와 꿈을 처음으로 공찬에게 고백했다. 소설 쓸 때면 동틀 때까지 잠을 안 자고 집중해도 하나도 안 피곤하다고, 버스 타고 창밖을 보다가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영감을 받아 문득 이야기를 써야지 생각이 들면 폭발적으로 상상이 이어지고 행복하다고. 그 말에 공찬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코딩도 그래. 코드 배우고 짜다 보면 잠도 안 오고 밤을 새도 끄떡없어. 두 사람은 감자튀김을 사이에 두고 먹지도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동질감 나눌 동류를 발견해 가슴이 벅찼다.



“진짜 속이 다 후련하네!”

말하며 희재는 제로콜라를 거의 원샷했다.



“나 글 쓰는 거 좋아한다고 태어나서 처음 말해봐! 이게 진짜… 무지하게 시원하네?”

남향의 버거킹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햇빛이 희재 안경알에 반사돼 반짝였다.



두 사람은 그 후로 버거킹에 자주 갔다. 시끄러운 케이팝 때문에 평소보다 큰 데시벨로 이야기를 하다가 배가 차면 공학관 꼭대기 B07호까지 걸어갔다. 이야기는 희재가 처음으로 케이팝에 눈을 뜨게 된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의 아이돌 그룹부터, 희재가 입덕을 하는 기준(이를테면 대형기획사의 너무 세련된 기획력에는 심장이 안 뛰고, 동방신기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는 크나큰 슈퍼스타라면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확고한 철학)에 대해 목이 쉬도록 떠들었다. 공찬은 희재가 케이팝 얘기를 해도 잘 들어줬다. 조용히 동의를 보여주는 제스쳐에 희재는 본인의 지난한 덕질 역사를 쏟아냈다.



자연스럽게 추자라는, 희재 인생의 완벽한 덕질 메이트에 대한 자랑으로도 가끔씩 이야기가 샜다. 같은 비주류 그룹을 좋아하되 절대로 최애 멤버가 겹치지 않는 최고의 소울메이트. 그러다 이야기는 다시 두 청춘의 꿈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이건 좀 더 비밀인데. 사실 내가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거든? 뭐랄까. 손가락을 가만 둘 수 없는 느낌?”



희재 표현으로는 <창작의 부스터>를 달아주는 치트키가 존재한다고 했다.



“뭔데? 나도 알려줘. 글쓰기 과제할 때 나도 그 치트키 좀 써먹고 싶어. 우리 과는 글쓰기 과제가 너무 많아. 힘들어.”



희재는 은밀한 이야기라며 몸을 낮추고 웃었다. 꿈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이 B07호의 먼지와 함께 버려진 공간을 날았다.



“뮤즈를 생각하고 글을 쓰면 돼. 그러면 쓰고 싶은 것들이 화수분처럼 무한대로 내 안에서 막 생겨. 걔만 생각하면 손가락을 가만둘 수가 없어.”



희재는 좋아하는 대상이 생기면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무대 위에서 짓는 다양한 뮤즈의 표정 연기를 쳐다볼 때면 이런 캐릭터부터 저런 캐릭터가 겪는 기구한 희로애락 이야기들이 마구 샘솟았다. 마치 옥수수가 팝콘으로 막 터지는 순간처럼.



“뮤즈? 그런 게 있어? 지금도 있어?”

“있었는데 없어졌어. 지금은 망해버린 아이돌이라서.”

“나랑 처음 만난 날 듣고 있던 노래 부른 그룹?”

“맞아. 프로스타스. 혹시 들어는 봤어?”

“아니 네가 그때 듣던 노래가 막 되게 케이팝 같았어서 기억해.”

“막 되게 케이팝 같았던 노랜 뭐냐. 아무튼. 프로스타스 좋아할 때는 쓰고 싶은 소설들이 미친 듯이 생각났어. 고등학생 때 야자실에 앉아있으면 문제집 밑에 노트 깔고 소설 쓰고 그랬는데.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고 싶은 거, 뭔지 알지?”

“당연히 알지.”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서로가 가진 것을 정반대로 가장 열렬하게 짝사랑한다는 동질감. 스물의 두 사람이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우정의 연료였다.



공찬이라는 좋은 친구를 만났지만 캠퍼스 삶이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과방에 가거나 전공수업에 가면 홀로 미운오리새끼가 된 심정이었다. 모두가 백조인데 홀로 흑조처럼 튀었다. 모두 같은 꿈을 꿀 때 혼자 그들과 다른 미래를 꿈꿨다. 전공은 재미없고 모두가 그리는 개발자로의 미래는 더더욱 관심 없었다.



S대학의 경우, 타 단과대로의 복수전공이나 전과 신청은 본 전공 학점 3.0을 넘겨야 가능했다. 학칙이 그랬다. 일단 선택한 전공부터 잘해야 바꾸거나 추가할 기회를 주겠다는 철학이었다. 희재는 결국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대학입학이라는 대의명분을 상실한 학업 의지는 꺾이다 못해 시들어 썩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엔 모두가 공부만 하니 희재 역시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매달렸다. 하지만 대학은 달랐다. 대학은, 대학은! 대학은! 대학까지 왔으면 무언가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또 하기 싫은 공부를 꾸역꾸역 해야 하는가? 희재 전공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방학 때 아르바이트와 계절학기를 병행해도 버거웠다. 코딩에 선천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머리가 있다고 선배들은 으레 떠돌아다니는 괴담을 설파했다. 아무리 봐도 희재에겐 그게 저였다. 머리가 타고나지 않으면 노력으로도 일정 수준 이상은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분야였으니 극복할 의지조차 솟지 않았다. 문창과엔 발가락 하나도 넣을 수 없고 속한 전공은 너무나 지루해 꿈과 현실 모두에게 거절당하는 듯한 기분으로 황망한 희재의 그 스물. 심지어 프로스타스 해체로 더 이상 소설 쓰고 싶게 만드는 뮤즈마저 없던 그 황량한 스물.



그 잿빛 스물을 구해주러 온 것처럼 <그것>이 나타났다. 희재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창작 욕구의 무한한 빅뱅을 일으켜줄, 고희재 일생일대의 뮤즈가 등장했다.



**



스물이 끝나가던 영하 십오도 극강 한파가 몰아쳤던 그날.



과외를 마치고 동기 R이 불러낸 자리에 나갔다. 경영학과 애들과 갑자기 잡힌 미팅이랬다. 미팅이라고 하면 질색하고 희재가 안 나올까 R이 살짝 친구 사귀는 모임이라고 둔갑했다. 둔한 희재는 그걸 미팅이라고 알아들을 법도 한데 속아서 나갔다. 나가면 맛있는 밥을 공짜로 먹을 수 있단 R 말에 혹했다. 비싼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으므로 희재 스물은 과외로 점철됐다. 하필 T가 아파서 못 오는 바람에 그들은 3:3을 맞추기 위해 희재를 구원투수로 부른 거였다.



희재는 술안주로 시킨 짬뽕 한 그릇을 혼자서 싹싹 비웠다. 과외 하느라 저녁을 못 먹어 너무 배가 고팠다면서 묵묵히 면발만 삼켰다. 미팅은 언제나 그렇듯 감동도 재미도 없었다. 여기서 다들 잘만 사귀고 없던 감정이 싹트고 발화되고 잎사귀도 돋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것 같은데, 희재 땅은 애초부터 글러먹은 것인지 무엇도 자라지 못했다. 키우고 싶은 맘도 없었다. 인생에 아주 많은 친구는 필요하지도 않았고 공찬과 추자 정도면 만족했다. 시간이 나면 중앙도서관에 처박혀 온갖 소설들을 섭렵하느라 바빴다. 지금까지 고등학교 도서관이나 동네 도서관과 차원이 다르게 책이 많았다! 게다가 더는 수학의 정석 아래에 소설책 숨겨두고 읽는다고 혼내는 선생님도 없었다. 맘껏 독서할 자유. 스물이 주는 유일무이한 해방감이었다. 미팅보단 도서관 구석에 처박히는 게 희재에겐 낙원이었다.



짬뽕을 야무지게 다 먹고 나자 이미 모두 이야기 잘 통하는 상대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때 똑같이 따분한 얼굴로 앉아있던 남자애 하나가 희재에게 나가자고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 다 후문 쪽에 사는 것도 같았다.



“이런 거 너무 재미없다.”



남자애가 말해서 희재도 큭큭 웃었다. 대학 참 별거 없다. 희재가 쭈욱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더운 호프를 나오자 온몸이 시리게 칼바람이 파고들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걸 보니 심상치 않았다.



“근데 과외 많이 해? 오늘도 저녁도 못 먹고 과외하고 왔다며. 무슨 과목 위주로 해?”

“나는 수학 위주로 해. 수학만 잘했거든. 수학밖에 가르칠 게 없네. 참.”

“맞다 컴공이랬지. 부럽다. 혹시 과외 한 명 더 늘릴 생각 없어?”

“안 그래도 하나 더 할까 생각 중이야. 이번 2학기 성적도 개판이라 계절학기 들어야될 거 같거든.”

“혹시 내 과외 안 받을래? 내가 지금 하는 앤데, 고1이고 문과 갈 거고, 우리학교 상경대 목표래.”

“왜 네가 안 하고?”

“나 곧 군대 가서.”

“그렇구나! 근데 나한테 물려줘도 괜찮아?”

“응 너 나랑 비슷한 거 같아서.”



남들은 비슷하면 사랑이 시작되는데 희재는 비슷한 친구를 만나니 과외 자리 하나가 돌아왔다. 사랑이 참 별일이고 별개되는 사람들이 있다. 애정과 사랑에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해서는 아니고 정말로 그 땅에서는 좀체 씨앗이 잘 자라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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