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는 전화번호를 지우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
은퇴 후 새롭게 시작된 인생 2막,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은 직장을 다니며 맺었던 인연들과의 단절일 것이다. 현직 때는 업무적이나 안부전화이거나 시도 때도 없이 울리던 핸드폰 벨소리는 은퇴 한 달을 기점으로 서서히 줄어들었고, 이제는 벨소리 한번 울리지 않는 하루가 보통의 일상이 되었다. 그나마 가끔 울리는 벨소리도 여론조사나 보이스피싱이 대부분이다. 은퇴 후 직장 인연들과의 단절은 책이나 유튜브를 통해서 많이 접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나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까?" 하는 희망적인 생각도 살짝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고 이렇게나 빨리 현실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사실 전화는 인연들의 반가운 소식도 있지만 직장생활 스트레스의 가장 큰 요소 중 하나 이기도 하다.
나도 직장생활 동안 많이도 시달렸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허전하고 섭섭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시간이 흘러가며 되려 마음이 자유롭고 편안해 짐을 느꼈다. 이참에 그동안 무거웠을 전화기를 가볍게 해 보기로 했다. 오지 않는 전화가 인생 1막 인연들과 작별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누구인지 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들과 직장을 매개체로 연결되어 퇴직 후에는 전혀 통화할 일이 없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가장 먼저 지웠다. 다음으로 2년 동안 서로 통화가 없던 사람, 이제는 인연을 더 이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함께 지웠다. 원칙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냉철하게 적용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 함께 놀던 고추 친구들, 혈연 그리고 정말 아끼는 사람들은 예외로 했다. 좋았던 기억의 이름들을 삭제할 때는 망설임도 있었지만 과감하게 지웠고, 대신 마음속으로 나마 미안함과 행운을 기원해 주었다.
간단한 일인 줄 알았는데 하나하나 살펴보며 하다 보니 며칠이나 걸렸고, 1,500개가 넘었던 전화번호는 200개 정도 남기고 정리되었다. 시원섭섭했지만 전화기도 나도 한결 가벼워졌다.
(전화번호 1,500개는 인맥이 넓어서가 아니라 명함을 받으면 예의상 전화번호를 저장했기 때문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인간관계 대부분은 전화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기에, 지워진 1,300개의 전화번호는 그만큼의 인연도 함께 정리된 샘이라고 할 수 있다. 인연이 빠져나간 자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자유로움과 편안함으로 메워졌고, 자발적으로 선택한 작별이기에 많이 고독하지도 않았다.
전화번호 정리 후 가끔씩 웃픈 해푸닝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 번은 평창 올림픽 때 함께 근무했던 분의 전화를 오랜만에 받은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통화를 하지 않은 관계로 당연히 그분의 전화번호도 삭제되었기 때문에 누군지 몰라 이름을 대며 반갑게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분은 오랜만에 불현듯 내가 생각나 전화를 했다고 하는데 목소리만으로 기억을 소환해 내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전화 말미에 솔직하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죄송하다 양해를 구했었다. 다행히 그분은 웃으면서 이해해 주시기는 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김 oo 팀장님, 건강하세요"
그 후로도 비슷한 해프닝이 여러 번 있었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때마다 그분들의 전화번호는 2년의 유효기간으로 다시 나의 전화기 안에 채워진다.
그리고 채운만큼 다시 비운다. 나는 인생 2막의 인연총량제를 철저히 지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