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후 3달이 지났다.
시간이 멈췄던 것 같았고 감정적으로 힘들었는데 이제 괜찮아졌고, 여유를 찾았고, 자신감을 되찾았다. 지금의 감정과 깨달음을 기록해 두면 비슷한 어려움을 겪을 미래의 내가 읽어 보고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꽤 오랜 시간 방치해 두었던 브런치를 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열심히 일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나를 내던져 빨리 성장하고 싶어서다.
전 직장에선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었고 워라밸도 좋았다. 조금 더 기다리면 업무적으로 좋은 기회가 올 것이고, 장기적으로 이직보다 더 좋은 커리어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됐다. 하지만 2020년 바쁘게 일하고 2021년을 여유롭게 보내면서 업무적인 텐션이 떨어지고 가열차게 일 할 의지를 잃었다. 지금 이렇게 여유있게 일하면 나의 경력은 어떻게 될까 걱정됐다. 이 회사에서도 길을 만들어가고 욕심내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럴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회사가 딱히 싫은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나는 어떤 상황에 놓이면 빠르게 적응하고 주어진 일을 어떻게든 하는 사람이지만, 능동적으로 일을 만들고 추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업무의 범위가 넓어지고 업무량이 많아지는 새 회사에 가면 어쩔 수 없이(?) 일을 많이 할 수 밖에 없고, 나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일을 만들며 한계를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도 수동적인 업무 태도는 바뀌지 않았지만, 더 높은 레벨에서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고 어느 때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논리적인 이직 사유고, 그냥 마음이 새로운 회사에 가고 싶었다. 이직했을 때보다 안했을 때 더 후회할 것 같았고, 이직이 내 인생의 레벨업은 못해줘도 경험의 범위는 넓혀주는 건 확실하다 싶어 그걸로 되겠다, 이직 고민을 끝낼 수 있었다.
하나 무서운 건 이번의 상황과 나의 생각이 첫 이직때와 소오름돋게 똑같다는 것이다. 참 사람 쉽게 안 변한다.
안 해봤던 방식으로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잘해야된다는 부담감과 불안정한 조직 및 정치질이 합쳐져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거기에 인간관계 이슈까지 터지면서 아주 멘탈이 나가버렸다.
그래도 이슈들이 하나씨 정리되었고, (내가 정리한게 아니다. 알아서 정리되었다. 내가 능동적으로 문제를 예방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답답해져서 생각을 접는다) 조직의 생태가 점점 이해되었고, 나의 R&R이 정립되면서 안정을 찾았다. 접근 방법부터 고민이 되는 업무가 하나 둘 씩 생겼지만, 여기저기 물어보고 책도 찾아보고 몇시간씩 멍때리면 고민하다 보니 내 욕심에 차진 않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 눈에 창피하지 않을 수준의 퀄티리로 업무를 해나갈 수도 있게 되었다.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다. (모든 건 지나간다. 미래의 나야, 너무 힘들어하지 마라 ㅋㅋㅋ)
업무 범위와 레벨이 높아졌다.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다.
경영학수업이나 책에서 보던 방식으로 업무에 접근하는 방법을 접하고, 직접 해보고 있다.
멘토로 삼고 싶은 너무나 똑똑하고 좋은 사람들을 얻었다.
약간의 돈.
한 회사를 오래 다니면서 얻는 회사에 대한 이해+네트워크
전 직장이 안정적인 대기업이었지만 안정성을 잃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 직장에 있었다면 가끔은 매우 바쁘고 대부분은 널널하게 보내면서 "이 회사에서 잘리면 난 뭐 먹고 살지" 하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계속 이직을 알아봤을 테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다.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이직하고 배웠다기 보다는 사수로부터 배운 점이 크다. 전략적 사고, 업무 접근방식, 대인관계 등 업무 방식부터 일잘러도 안 보이는 곳에서 오랜 시간 고민하고 노력해서 성과를 만들어낸다는 단순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진리까지. 사수로부터 배운 것만으로도 이직 잘했다고 생각할만큼 너무나도 좋은 영향을 받았다.
새로운 회사에서 배운 점도 많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먼저 조직의 업무 방식 및 R&R을 이해하고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목적부터 이해할 것. 대응하지 말고 리딩할 것. 이 점들이 이행되지 않으면 시행착오가 커지고 마음의 상처도 받는다.
당장의 소득과 여유시간은 줄어들었으니 이번 이직이 조기은퇴 여정을 조금 더 길어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력을 잘 쌓고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미래 소득을 크게 늘린다면 조기은퇴 여정은 더 짧아질 것이다.
좋은 선택은 선택 자체보다 결과가 말해준다. 그러니 나의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자기계발서적이고 오그라드는 말로 마무리 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