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을 한지 벌써 3년이 넘어간다. 휴직 전에 꼭 하고 싶었던 것들이 있다.
1. 평일 여유로운 시간대에 은행, 관공서에 가기
2. 평일 오전에 도서관 가서 마음껏 책보기
3. 평일 점심 때 동네 주민들의 브런치 명소에서 시계없이 수다꽃 피우기
4. 오후 3시 30분에 직접 아이 하원하기
주말에는 문을 닫거나, 사람이 많은 곳에 평일에 여유롭게 갈 수 있다는 것, 직장인으로서의 소소한 꿈이었다. 휴직을 하고 처음에는 어색했다. 모든 시간이 온전히 나의 몫이 되니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몰랐다. 남들은 집안 청소도, 요리도 아이가 오기 전에 모두 마치고 평온한 마음으로 아이를 맞이한다던데,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아이가 온 후 허겁지겁 이것저것 집안일과 육아를 저글링했다. 몇년이 지났다.
4살에 휴직했던 아이는 벌써 8살이 되었다.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서 걷고 이제 어린이집에 간다. 8년 전 유모차를 끌고 동네에 나가면 애기엄마 같지 않게 이쁘다는 말을 이따금씩 들었다. 흰 머리도 처음에 생기면 충격이다. 흰 머리를 몇개 뽑다가 잠든 날에는 백발머리가 된 꿈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깨어나면 흰 머리가 극소수인 지금을 감사해했다.
이제는 흰 머리의 비중이 늘어난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웃으면 고양이 수염처럼 눈가에 주름이 생기고 여유로운 뱃살도 보유하고 있다. 부부의 나이차이가 적어서 좋은건 늙음의 속도를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른들의 이쁘다는 말은 얼굴이 이쁘다는 뜻이 아니라, 젊음이 이쁘다는 뜻이다. 이제 중년이 되어가는 내가 20대 풋내기들을 보면 이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그 때는 모른다. 젊다는 사실을. 아마 나중이 되면 이 글을 쓴 나에게 분명 말할 것이다. 젊다는 사실, 그 땐 몰랐구나.
육아로 3년 휴직, 코로나로 남편과 동반휴직 1년, 휴직자로서의 삶은 나에게 새로운 것을 깨우쳐주었다.
휴직은 사회적 지위가 없는 순수한 1명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경험이다. 수익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필요한 지출도 없다. 가정에서 엄마와 주부의 역할을 제대로 맡는다. 집을 지키는 파수꾼이며, 가족에게 웃음을 선물하는 햇님같은 존재가 된다. 저녁이 되어도 남아있는 장작의 온기가 가족을 따스하게 안아준다.
돈과 나의 시간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삶을 경험한다. 소비와 소유를 위해 소모할 필요가 없어지는 시간을 경험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를 위해 나를 사용해본다.
지인이 있다. 억대연봉에 모두가 부러워하는 풍요로운 삶을 산다. 하지만 성과와 실적을 계속해서 내야 하는 사업을 하고 있기에 진정한 휴식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작년보다 올해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목표를 초과 달성할 수 있을지 늘 그 생각에 머물러있다. 일하지 않는 시간 조차도 일하는 상태다. 어떻게 하면 실적을 더 높일 수 있는 방법,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든 점들을 이야기했다. 그 때,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이건 예전부터 궁금했던건데, 인생의 최종적인 목적이 뭐야?, 일 말고, 그냥 삶에서 궁극적으로 얻고 싶은 것 말이야."
지인은 한참 말이 없었다. 말을 하려다가, 이내 말을 잃었다.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인생의 최종적인 목적, 그런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나도 할말을 잃었다. 너무 당연해서, 너무 막연했던 것이기에. 가령 행복이 목적이라면, 어떤 방식의 행복을 어떻게 이루고 싶은지 깊이 숙고하고, 답을 찾았는가.
자기계발서에는 항상 이런 내용이 있다. 삶의 빅픽쳐를 그려라. 연 단위, 월 단위 목표를 짜서 실행에 옮겨라. 휴직동안 수없는 독서, 자기계발서를 읽었음에도 인생의 구체적인 목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목표가 아닌, 목적 말이다. 눈에 그리면 뚜렷이 그려지는 미래의 모습이 희미했다.
10년간 준비하고, 10년간 필드에서 일하고 40대를 앞두고 있다. 휴직을 거쳤다. 평생 동반자로 살게 될 남편과 짧지만 깊은 대화를 나눴다.
일과 삶의 경계가 있는 상태, 일과 개인의 삶이 오갈 때 온오프가 가능한 상태, 일이 삶을 해치면 언제든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상태.
우리는 그런 상태를 기대한다. 영화 [나의 아저씨]에서는 아이유(극중 지안)를 만난 이선균이 이런 말을 한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김연아가 20078년 갈라쇼 때 배경음악으로 선택한 노래, GOLD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과거를 놓아주려 합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
더이상 눈을 감지 않고 주어진 삶을 살아갈꺼예요
굳건하게 서서 하늘을 똑바로 바라보며
무관심에 맞서서 정열적으로
그럼 어느 순간 찬란한 빛을 발견하겠지요
And now I lay the past to rest
For in the end I did my best
You have to live the life you're given
And never close your eyes
You hold on, and stare into the sky,
And burn against the cold
For any moment, you might find the gold!
시공간적인 자유를 주는 삶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삶, 지금이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열심히 달려온 동반자와의 시간, 또 앞으로를 향해 달리는 지금, 나를 알고 내일을 준비하는 지금이 있어 내일도 행복할거라 믿는다.
인생은 길지 않다. 미래를 향해 달리자. 젊음을 기억하자. 필요한 것을 모두 싣고 긴 로드트립을 떠나는 그날, 나의 나이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시기를 당기기 위해 우리 부부는 오늘 함께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