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숙제 없이 잘 먹고 잘 쉴 겁니다!
스물여섯 살,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고 휴가 이외에는 길게 쉬어본 적 없는 나는, 늘 “언젠가 퇴사를 하게 된다면, 긴 휴식을 가져볼 거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남들은 이직을 하며 1~2주, 길게는 한 달 정도는 쉬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곤 한다는데, 휴식 없이 회사를 옮겼던 나는 늘 ‘휴식(긴~휴식)’에 집착했다. 그리고 지난 5월을 마지막으로 회사생활을 종료하며 긴 염원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번아웃이 겹치면서 더 간절하게 휴식을 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6월, 여름이 시작되면서 나의 긴 휴식인 서른네 살의 여름방학도 같이 시작되었다. (휴식을 원했던 만큼 “백수생활”이 아닌 “여름방학”으로 나름 타이틀도 붙였다 ㅎㅎ.)
퇴사 후, 친구와 지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을 꼽자면 첫 번째는 단연 “언제쯤 다시 일 시작할 거야?”였는데, 그 말에는 늘 나를 걱정하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코로나 이슈, 여자, 서른 중반의 나이, 이런 점들이 채용시장에서 불리하게 작용하진 않을지 걱정하는 모습들이었다. 두 번째는 “그래! 백세시대인데 인생에서 이만큼의 휴식기간은 걱정할 일도 아니야.”였고 그 말에는 나를 향한 응원이 담겨있었는데, 내가 불안으로 이 휴식을 충분히 즐기지 못할까 봐 어깨를 두드려주는 모습들이었다. 그들의 걱정과 응원을 동시에 받으면서 내가 느낀 점이라면, 의외로 “응원”을 더 강하게 받았다는 점이다. 몇 년 전 서른을 넘기면서 퇴사를 생각했을 때 지인들의 반응은 응원보다는 걱정이 더 강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퇴사에 대한 사회 전반적 인식이 부정에 가까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 트렌드와 환경들이 빠르게 변하면서 퇴사가 아주 못할 일처럼 여겨지는 문화는 많이 사라진 것 같고 개인의 행복이 중시되면서 퇴사를 장려하는 문화가 많이 생겨난 것 같다. “일”은 나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이다. 현재와 같은 트렌드가 아니라면 나도 퇴사를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주위의 반응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나는 나대로의 주관을 가지고 이 휴식을 잘 즐기면 되는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누르는 일도 쉽지는 않다. 여기 브런치를 포함하여 퇴사 관련 다양한 에세이나 책, 인터뷰들을 접하면서 퇴사한 선배님들의 노하우를 통해 불안하지 않은 휴식을 보내려 노력 중이지만, 내 의지대로 잘 안 될 때 도 많다. 퇴사를 하면 하고 싶었던 일들 중에서 몇 가지는 앞으로의 커리어와 관련된 것이 있고, 몇 가지는 커리어와 상관없는 내면의 수행이나 운동, 자잘한 취미활동 등 취미와 휴식에 관련된 활동도 있다. 그런데 커리어와 상관없는 일들을 할 때 그렇게 불안감이 고개를 쓱 내밀며 “네가 지금 이거 할 때야? 이거 할 시간에 니 일이랑 관련된 자격증을 하나 더 따! 아니면 빨리 회사를 다시 다녀!” 한다. 그러면 또 속절없이 마인드 컨트롤이 무너지면서 채용공고 사이트를 기웃거리게 된다.
그러나 흔히 말하듯 인생을 “장거리 마라톤”이라고 했을 때, 페이스의 조절 없이 빠른 속도로, 또는 같은 속도로 계속 뛰어가는 것은 중도에 낙오를 불러오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긴 여정을 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불안감과 조급함을 내려놓고 어느 지점에서 내가 달려야 하고 쉬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달려야 할 때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달리고, 쉬어야 할 때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쉬어야 다음번의 달리기와 쉼에 더 충실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인드 컨트롤이 쉽지는 않지만 쉬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내려놓고 온전히 쉼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To do list에 얽히지 않고, 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숙제 없는 휴식을 지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퇴사 전, 번 아웃에 접어들었을 땐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들이 만든 예쁜 광경 조차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퇴사 후 휴식을 하게 되면 가장 느껴보고 싶었던 감정은 “하늘이 예뻐 보이는가!”였다. 그리고 지금은 간사한 사람의 마음이 그렇듯, 하늘이 너무 예뻐 보인다. 여유가 선물하는 이 감정을 좀 더 충실히 느껴보고 싶다. 불안해하지 않고 온전히 이 여름방학(여름방학이 겨울방학까지 이어질 수도 있지만)을 숙제 없이 잘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