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
아마 이 장면이다. "The dignity always prevail." 품위가 항상 이긴다, 품격이 항상 이긴다. 늘 그렇다. 셜리 박사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이 백인 남자에게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이 한마디에 셜리 박사의 인생 방향, 셜리 박사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그가 속한 사회, 셜리 박사가 살아남은 생존 방법이 모두 드러난다. 흑인이지만 품위를 갖춘, 그 품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지켜왔던 셜리 박사의 삶. 그린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과 대사일 것이다.
그린북, 초록색 책?
그린북은 '빅터 휴고 그린'이라는 한 흑인 우체부가 흑인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숙박시설, 주유소, 식당, 여가 시설 등을 정리해놓은 유색인종을 위한 여행 가이드 북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인종 차별이 계속되었더라면 아마 서점의 여행 코너에 나라별로 즐비해있는 여행 가이드북들 속에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대에, 미국 남부 투어를 시작하는 돈 셜리 박사에게는 매니저가 필요했고, 토니는 그가 찾던 적임자가 되었다. 서로를 진실로 이해하는 두 사람의 우정에 흐뭇하고, 함께 헤쳐나가는 모험이 짜릿하다.
그린북은 인종차별의 시대에 비즈니스 사이로 만난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전에 영화들은 이렇게 인종이 다른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 사회적 위치가 낮은 사람을 유색인종으로 묘사하고 그 반대의 사람을 백인으로 묘사하며 그 둘의 특별한 사이가 완성되어 나가는 과정을 그렸던 것 같은데 그린북은 그런 관습적인 인물 구도와 정 반대의 인물 구도이다. 셜리 박사는 유색인종이지만 그의 호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배울만큼 배웠고 온몸에 품위가 배어 있는 상류층의 모습이고, 토니는 이탈리아계 백인이지만 생각이 행동을 제어하지 않으며 품위라고는 없어 귀티(?)와는 거리가 멀다. 두 인물에서 보듯이, 이렇게 세상은 점점 이분법적으로 나뉘었던 강자(가 누구였는지)와 약자(가 누구였는지)의 프레임을 허물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온정을 베풀며 감동을 자아내는 스토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영화는 무겁지 않다. 적절한 유머와 재치와 감정선이 어우러져 보는 내내 웃음을 주고, 감동을 준다. 돈 셜리 박사와 떠벌이 토니가 나누는 대화는 재미있었고, 인종 차별을 따끔하게 꼬집는 인물들의 대화는 속이 시원한 편이다. 그리고 흑인이 연주하는 피아노 음악에 빠져 기립박수까지 치지만 속으로는 돈 셜리 박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위선, 또는 특별히 무시하는 것 같다기보다는 사회적인 통념에 젖어 그 차별이 나쁜 것인지도 모르는 듯한 태도들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너무나도 대단한 연주라며 찬사를 보냈던 연주자가 화장실을 사용하면 뭐가 어때서?)
캐릭터를 온몸으로 입은 마허 샬라 알리
좋아하는 배우 마허샬라 알리의 연기가 내내 흐뭇했다. 돈 셜리 박사 역의 마허샬라 알리의 그 품위 가득한 모습,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류층의 교양을 품은 듯한 그를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연기를 하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
이 스틸 컷처럼, 살짝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는 모습은 온화하며 지적이며 우아하다. 그 역할에 온전히 몰입하여 실제 그 캐릭터로 분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느끼게 된다.
마허샬라 알리는 [문라이트], [히든 피겨스]에서도 조연으로 멋진 연기를 펼쳐주었었는데, 히든 피겨스에서는 돈 셜리 박사와 비슷한 느낌의 군 장교 역을 소화해 냈고, 문라이트는 어린 샤이론에게 좋은 어른인(진짜 어른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어른) 후안 역을 소화해 냈다. 특히 문라이트에서는 다 합쳐 약 20여 분간 스크린에 등장했음에도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 조연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 문라이트에서의 마허샬라 얄리의 느낌은 그린북과는 많이 다르다. 조연이지만 울림 있고 여운 있는, 성숙한 어른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그는 문라이트의 후안 역으로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연을, 그린북의 돈 셜리 역으로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연을, 총 2번 수상하게 된다. (멋있는 사람 +_+)
실화를 좋아하는 아카데미의 성향이 작용한 것인지, 그린북은 91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까지 수상하게 되었다. 다들 다른 작품이 수상할 것이라고 예측하였고, 이번 아카데미의 최대 이변이라고도 한다. 나도 영화를 잘 알진 못하지만, 작품상 수상까지의 압도적인 작품성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마음 아픈 과거가 있었으니 앞으로 모든 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떤 것인지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측면에서는 수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카데미 시상식 전엔 많지 않았던 상영관이, 이슈 이후 상영관을 늘리고 지금까지 상영을 하고 있다. 캐릭터를 온몸으로 입은 마허샬라 알리와 멋진 아라곤에서 동네 아저씨 느낌이 가득한 비고 모텐슨, 따뜻한 실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충분히 가치 있는 영화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