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미안했어
가끔 그럴 때가 있다. 한국에서 서툰 한국말로 "빨리빨리"를 외치는 외국인들을 보는 순간.
서툰 발음에 웃음이 나다가도 생각해 보면 조금 서글퍼지기도 했다. 어쩌다 '한국 = 빨리빨리' 인식이 자리 잡게 된 걸까.
'빨리빨리'라는 말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을 할 때에도, 개인적인 취미를 할 때에도 서두르다 보면 항상 놓치고 가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여유가 없다는 건 그만큼 곱씹어 볼 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는 뜻이고, 그럼 결국 실수가 생기곤 한다.
그래서 늘 외국이 부러웠다. 심지어 어떤 국가들은 '시에스타'라는 낮잠 시간까지 두고 있지 않은가. 여유와 느긋함이 가득한 삶, 너무나도 빠르게 돌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1인으로서 참 부러웠다.
'빨리빨리'를 싫어하지만 그날만큼은 '빨리빨리' 해야 했다. 개심사에 핀다는 왕벚꽃, 청벚꽃을 보겠다고.
서산 개심사는 절보다 벚꽃이 더 유명하다. 그 이름만큼이나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왕벚꽃'과 흔히 볼 수 없는 '청벚꽃'이 피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친구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벚꽃보다 조금 늦게 피는데, 그 시기가 정해져 있어 사람들은 매번 '개심사 청벚꽃 개화시기', '개심사 왕벚꽃 언제 피나요'를 검색하곤 한다.
오전 7시 출발. 일찍 가지 않으면 주차를 할 수 없다는 말에 아침 일찍 서둘렀다. 참고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새벽 같이 일어나는 걸 굉장히 싫어하게 된 1인이다. 그것도 주말에. 주말 만이라도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고 싶은 마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엄마와의 여행에 나 하나 여유 부리겠다고 그럴 순 없지. 속으론 불평하며 고분고분 새벽 같이 일어나 개심사로 향했다.
9시도 안 돼서 도착, 벌써 주차장은 바글바글, 주차 가능 자리는 하나. 새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다 느끼며 개심사의 벚꽃들을 즐기기 시작했다.
놀라운 건 예쁜 벚꽃들을 마음껏 만끽하고 나와서도 아직 아침 10시가 안 됐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 먹을 시간인데...
남아도는 시간, 구경이나 더 하자 싶어 근처 문수사 겹벚꽃도 구경해 주는 여유.
그렇게 우리는 여유롭게 서산 여행을 이어나갔다. '빨리빨리'가 가져다준 여유였다.
아이러니했다. '빨리빨리'는 여유와 아주 먼 대척점에 서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여유를 가져다줬다.
아침 여유를 포기하고 오후 여유를 찾게 된, '조삼모사'라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간의 생각과는 조금은 다른 느낌을 받게 된 건 분명했다.
'빨리빨리'라는 건, 이후에 있을 여유를 위해 미리 준비하자는 것과 같다는 걸. '빨리빨리'가 여유 있는 삶을 싫어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어쩌면 '빨리빨리'가 누구보다 더 여유로운 삶을 원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