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거라, 살아서 누려라
전직 영화기자의 가끔 오는 영화 리뷰... 이지만 어쩌다 보니 드라마가 더 많아진 리뷰 시리즈. <나는 왜 연인 폐인이 되었나>에 이어.
(이 글에는 <연인>의 결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지금 바로 '뒤로' 버튼을 눌러주세요)
MBC 드라마 <연인>이 끝이 났다. 당초 20화였으나 1화가 연장되어 21화로 최종화를 마무리했다. 비록 파트 1과 파트 2 사이에 빈 공간이 있었으나 첫 방송이 됐던 8월부터 지금의 11월까지, 약 3개월 간 <연인> 폐인들을 웃고 울렸던 <연인>에 대한 리뷰를 다시금 해보려 한다.
앞서 <연인> 파트 1에서는 내가 어쩌다 <연인>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적어보았다면, 오늘은 <연인>의 결말이 왜 해피엔딩이어야만 했는지, 내가 3개월 간 <연인>을 보며 느꼈던 점을 적어볼까 한다.
최종화를 함께 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연인>은 꽉 닫힌 해피엔딩으로 그 끝을 맺었다. 사실 <연인>이 시작할 때만 해도 모두가 새드엔딩을 예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인>이 선택한 시대적 배경이 그런 추측을 나을 수밖에 없었다. 병자호란이라는 대혼돈의 시기에, 심지어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소현세자와 얽힌 이장현이라는 남자. '환향녀'라는 손가락질이 당연했던 그 시기에, 심지어 청으로 납치돼 끌려가야만 했던 길채라는 여자. 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달려갈 것이란 건 쉽사리 예측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연인>을 보면 볼수록 <연인>은 해피엔딩이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꽤나 속이 상했을 것 같았다. 물론 장현과 길채의 사랑이 너무나 숭고하고 아름다워 두 사람이 그저 행복하길, 시시콜콜 알콩달콩 삶을 살아가길 바란 것도 맞다.
그치만 장현과 길채의 사랑 외에도 <연인>은 해피엔딩이어야만 했다. 장현과 길채가 대표하는 사람들, 두 사람이 살아온 삶에 그 이유가 있었다.
장현과 길채는 삶의 소중함을 알기에 살아가려 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이다. <연인>을 보신 분들이라면 장현과 길채가 얼마나 '살고자' 했는지 아실 테다.
장현은 "왕을 위해, 나라를 위해 장렬히 싸우다 죽자" 외치는 장군 앞에서 "싸워서 이길 생각을 해야지 왜 질 생각부터 하냐"는 말을 하는 사내였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고초를 겪는 소현세자 앞에서도 "살아서 백성과의 의리를 지켜달라"라고 말하는 역관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누이 때문인지 죄 없는 이들이 목숨을 잃는 꼴은 못 보는 사람이기도 했다.
길채는 어떤가. "오랑캐에게 손목만 잡혀도 여인은 정절을 잃은 것이니 자결해야 한다"는 당대 시대 분위기에서 무조건 살아남으려 했던 여인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여인들을 살려내고, 자신 역시 어떻게든 살아 나가려 했던 억척스러운 여인이었다.
이 둘은 <연인>의 작가가 당대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와도 같다. 병자호란은 당대 시대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사건이었다고 치자. 어떻게든 세력을 확장하고 명을 견제해야 했던 청나라였기에 아무리 인조가 좋은 정치를 했어도 전쟁은 어떻게서든 일어났을 일이라고 치자. 포로로 끌려가야 했던 백성들의 신세 역시 패전국의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고도 치자.
하지만 그럼에도 남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어떻게든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건 왕과 신하들의 책임이자 의무였다. 그러나 인조는 어떠했나. 언제 자신이 보위에서 끌어내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백성을 살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고통받는 건 백성들이었다. 왕처럼 백성들도 살고 싶어 했을 터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테고, 살아남아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참하게 버려졌고 이름 모를 무수히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와중에 여인들은 고향에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후의 삶은 비참했다. '환향녀', 후대에 비속어로 쓰이던 말의 어원일 '환향녀'는 말 그대로 '고향에 돌아온 여인'을 뜻했다. 청나라에 끌려갔지만 다행히 값을 주고 속환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오랑캐에게 손목만 잡혀도 정절을 잃었다'라고 손가락질하던 당대에 '환향녀'들의 삶이 제대로 되었을 리 없다.
청나라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것도 억울한데 돌아와 이혼까지 당하는 일은 허다했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장현과 길채가 이처럼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위로임을 잘 보여주는 건 장현과 길채가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어떤 길채라도 그저 '길채'면 된다던 장현에게 길채가 머뭇거리며 건넨 말은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길채는?"이었다. 그 어디서도 당당했던 길채가 사랑하는 장현 앞에서 유일하게 머뭇거렸던 순간. 하지만 장현은 길채를 끌어안아줬다. "안아줘야지, 힘들었을 테니".
둘이 당대의 서민들을 대표하고 있으니, 이 둘은 끝내 살아야 했다. 그리고 행복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대의 서민들에게 전하는 위로가 아니었을 터다. "고생했습니다, 이렇게라도 살아주세요. 후대에서나마 그대들을 위로합니다. 고생했다고. 미안하다고"
그래서 <연인>의 결말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 과정을 가기까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으나 결말만큼은 만족스럽다.
<연인>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 드라마였다. "겁에 질린 자는 잔인해진다"라는 대사가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 두려움에 집어삼켜지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워 나간다면.
어디선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장현과 길채를 생각하며 다시 <연인>을 정주행 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