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노무사가 물었다.
"혹시 사인하셨나요?"
"아니요, 아직이요. 어제 통보받았는데, 서류가 도착하지 않아 아직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동의 서명을 하고 뒤늦게 찾아오시는데, 굉장히 특이한 경우네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해고통지서에 서명하실 의무가 없습니다.
보통 서명을 하고 오시면, 되돌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회사와의 협상이 어렵습니다.
근데 아직 서명하기 전이시라면, 회사와의 협상에서 유리하고 원하신다면 회사를 그냥 다니셔도 됩니다.
하지만, 보통 이런 통보를 받으시고 나면 회사를 떠나긴 하세요."
마음이 놓였다.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라니..
이제부터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회사를 그들의 뜻대로 그만둬야 할지, 아니면 우겨서 계속 다녀야 할지.
계속 다닌다면 아마 대기발령이나 다른 차원의 괴롭힘이 회사에서 있을 수도 있다고 노무사가 전했다.
"네, 의견 감사드립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무실로 돌아가니, 일본 매니저가 서류를 출력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미안하지만, 난 오늘 서명하지 않을 거야. 방금 노무사를 만나고 왔어.
한국의 노동법상 나는 서명할 의무가 없다고 해.
내가 좀 더 고민해 보고 알려줄게."
칼자루는 내가 쥐었다.
일본매니저는 이 상황을 알았다는 듯이, 괜찮다 말하며 한국을 떠났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본사에서 해고를 못한 사람은 나뿐이라고 한다.
감사해야 하나.
이 무렵, 진우에게 연락이 왔었는지 먼저 했는지 모르겠다.
우린, 신촌에서 다시 만났다.
내 나이 곧 서른,
진우는 스물일곱을 앞둔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