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의 언어를 알면 좋은 이유

밀라노 여행 중에 생긴 일

by 초록풀잎

나의 첫 해외여행은 1박 3일 도쿄 여행이었다.

당시 사용하던 휴대폰 통신사 이벤트에 당첨된 것이었는데 난생처음 해외여행이라 여권도 처음 만들었다.

그때 여행 준비를 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건 언어였다.
일본어는 정말 하나도 몰랐고, 영어는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게 다였다.
그래서 너무 두려운 나머지 통신사에서 나눠준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여행 회화를 적어가며 공부했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 살다왔다는 친구의 친구를 만나 간단한 언어를 배우기도 했다.
예를 들면 지하철 역은 ‘에끼’, 휴대폰은 ‘게 따이’. ‘신주쿠 역이 어디입니까?’는 ‘신주쿠 에끼 와 도꼬 데스까?’ 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정작 도쿄에 가보니 일본어는 별로 필요가 없었다.
도쿄는 워낙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이라 그런지 표지판에 한국어로 쓰여 있는 곳이 많았고, 영어는 기본이었다.

그리고 영어가 통하는 일본 사람들이 꽤 있었고, 만약 없을 때에도 바디랭귀지로 충분히 말이 통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스러운 하라주쿠역사



그러자, 여행이 즐거워졌다.
몇 마디 열심히 외워간 일본어로 대화할 때, 혹은 영어 단어들을 나열해도 서로 대화가 될 때...

그런 재미가 해외여행의 재미라는 걸 깨달았다.


이후 나는 영어도 못하면서 배낭여행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됐고, 인도 유럽 등을 여행했다.
인도는 영어가 공용어이므로 큰 문제가 없었고, 유럽도 대부분 괜찮았다.

2006년 떠났던 첫 번째 유럽여행 중 오스트리아 빈에서 경찰 사칭 소매치기를 당한 여파로, 일정이 꼬였었다. 당시 나는 첫 유럽여행인 만큼 유럽 여러 나라를 골고루 돌아보려던 야심 찬 계획이 있었는데 소매치기당했을 때 여차저차 하다 카메라를 경찰서에 두고 오는 바람에 스위스에서 다시 빈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데 시간을 많이 써서 결국 계획표에서 일주일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스페인 일정을 아예 빼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웃하는 지역이었던 프랑스에 길게 있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프랑스 파리에 머물면서 고흐가 살던 마을인 ‘오베르 쉬르 우아즈 Auvers-Sur-Oise’에 갔었는데 그곳에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한 한국인 동생이(갓 군 제대한 청년) 스페인에서 넘어왔다며 바르셀로나와 가우디가 얼마나 멋졌는지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나는 스페인에 대해 아쉬움만 더욱 커졌다.


그 유럽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스페인에 못 간 아쉬움을 계속 가지고 살았다.
그래서 결혼 후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남편은 그즈음 생일 선물로 “스페인 가자!”라는 이름이 담긴 통장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매달 20만 원씩 통장에 입금하면서 우리는 또한 주말마다 스페인어 학원에 다녔다.

홍대에 있는 스페인어 학원을 다니면서 그때 한창 생겨나던 예쁜 북카페를 찾아다니며 복습하던 기억...

정말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스페인어 학원에 한 4개월 정도 다닌 즈음의 어느 날, 기적처럼 그 기회가 찾아왔다.

남편이 회사의 영국 런던 지점에 3개월간 파견 근무를 가게 된 것이었다.
'야호~~ 런던에서 지내다 보면 스페인에도 갈 기회가 있겠지.'
남편은 일 때문에 먼저 출발하고 나는 이번 기회에 서유럽에 가보지 못한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지난번에 갔던 주요 여행지에 그때 못 가봐서 아쉬웠던 곳을 더해 일정을 짰다.
지난번에 런던-암스테르담-뮌헨-빈-프라하-베른-인터라켄-베네치아-피렌체-로마-파리 대략 이런 식으로 다녔다면, 이번엔 런던-파리-니스(아비뇽-생폴-아를-망통-칸 등 포함)-베른-인터라켄-루체른-밀라노-베네치아-피렌체-로마(포지타노, 카프리 포함)... 이런 식으로 엄마가 가보고 싶어 하는 굵직한 서유럽 도시들을 중심으로 평소 관심 있었던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남부를 포함한 일정이었다.
엄마를 모시고 가는 거라 부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번 갔을 때 영어가 좀 부족해도 문제없이 다녔으므로 언어에 대한 특별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밀라노에서 발생했다.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에 보면 기차 매표창구에서 영어가 가능한 직원을 만나지 못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어가 가능한 직원은 딱 한 명뿐인데 좀처럼 그에게 그 직원을 만날 기회가 오지 않는 것이다. 이상하게 영어를 못하는 직원만 계속 만나게 돼서 화가 난 작가가 번호표를 왕창 뽑자 계속 그 직원이 작가가 뽑은 번호를 부르는 웃지 못할 상황이 계속되는 이야기. 나도 그 비슷한 일을 겪었다.



밀라노에서 기차표를 끊으러 갔는데, 평소 기차표를 끊을 때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메모지에 출발지와 도착지, 시간과 인원을 적어서 보여주는 방식을 썼다.

그러면 항상 특별한 경우(표가 매진되는 등)를 제외하곤 표를 내주었다.
그런데 밀라노에서 똑같이 적은 메모를 내밀었는데 그 직원이 화를 내듯 소리를 지르며 “블라블라 블라” 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어 영어로 해달라고 하니 목소리는 더 커졌다.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직원이 내게 다가와 영어를 하는 사람을 불러오겠다는 뉘앙스로(순전히 내 느낌) 말해서 좀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 매표소 직원이 너무 자꾸 화를 냈다.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그 순간, 내 귀에 꽂힌 한 마디.
“벤티”


‘20? 20이라고 하는 건가. 20유로 내라고?’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 20유로를 꺼내서 내니 갑자기 이 언니 얼굴이 환하게 풀리면서 돈을 받아 들고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스페인어로 20이 ‘베인떼 veinte’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우연찮게 이태리어 ‘벤티 venti’를 알아듣게 된 것이다. 너무 다행스럽고 안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어찌 보면 정말 단순한 상황인데 그녀는 왜 나에게 메모라도 해서 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렇게 소리를 벅벅 질러댔을까. 말이 통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자신의 스트레스였는지, 약간의 인종차별적인 심리의 발로였는지 모르겠으나 내 귀에 꽂힌 그 한 단어 덕분에 나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밀라노는 아름다웠지만 힘들었던 기억만ㅋㅋ


엄마와 유럽여행을 무사히 마친 후 엄마는 한국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남편이 있는 런던으로 가서 또 여행을 했다. 그리고 파견 근무 마무리 후 한국으로 오기 전 약 일주일간의 스페인 여행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간 배운 스페인어를 써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길 가에 표지판도 읽을 수 있었고, 안내문 같은 것도 읽어보고 메뉴판도 읽을 수 있었다.
길을 모를 때는 자신 있게 스페인어로 물어보기도 했다. (답변을 정확히 못 알아듣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한 번은 길을 잃어서 버스 정류장에 계신 어르신들께 여쭤보았는데 그중 백발의 어여쁘신 할머니가 우리에게 자신과 같이 버스를 타자며 버스비도 내주시고 버스에서 내내 그 동네 소개를 해주셨다.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알아들을 수 있어 재밌었다.
그 할머니는 우리가 가는 광장에 본인도 가신다며 같이 내리자고 하셔서 우리가 뭐 하러 가시냐고 여쭤보자 친구들과 차 한잔 하러 가신다고... 그 대답을 알아듣고 우리가 얼마나 재밌었는지...
그리고 내려서 감사인사를 드리는데 내 얼굴을 쓰다듬으시며 “구아빠”라고 말씀하셨다.
예쁘다고?


sticker sticker

너무 따뜻한 마음과 그 말들. 약간이나마 스페인어를 배운 덕에 그렇게라도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재밌고 좋았는지.... 헤어질 땐 진심을 다해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할머니와 헤어졌던 장소 - 말라가의 광장 모습



내 경험상 외국 어디서든 영어가 어느 정도는 통하고 안 되면 또 바디랭귀지로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되므로 여행하는데 외국어를 할 수 있는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주 잘 하지 못해도, 그 나라의 언어를 약간만 해도 현지인들과 조금이라도 대화를 나눠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그 재미는 정말 상상 이상이다.
그 나라의 사람들처럼 유창하게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것이 힘들다면 최소한의 인사말과 기본 단어, 숫자 정도를 익혀 가는 것은 여행에 큰 도움을 준다.

일본으로의 첫 해외여행 이후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가 그만두고, 또 스페인어도 4개월 배운 게 다이고, 여행 갈 때마다 영어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결국엔 또 작심삼일로 끝나고 말았지만.....(난 아무래도 언어에 소질이 없...)

언어를 어느 만큼 아느냐가 그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나름의 언어 공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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