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기억하는 또 다른 방법

음악과 함께하는 여행

by 초록풀잎

여행을 하다 보면 무언가를 느끼기도 전에 사진부터 찍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그 무언가가 좋을 때 더욱 그렇다.


사진을 찍느라 그 무언가를 주의 깊게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사진보다 그림을 그리라고 추천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 어느 순간보다 그 순간을 주의 깊게 볼 수 있으므로...

나도 그림을 그려보려 했으나 평소 그림을 그려본 적 없다 보니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엔 사진을 열심히 찍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찍느라 눈에,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진을 찍지 않으면 그 순간들을 기억하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당연하게도 시간이 오래 지난 여행일수록 사진이나 글 없이는 기억을 되살리기 힘들다.

나는 가끔 사진을 넘겨보며 지난 여행의 기억을 되살려보곤 하는데 기억은 나지만 사진이 없어 아쉬운 순간들도 많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진이 없어도 또렷이 기억이 나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그 순간
음악이 함께 했을 때..


2006년 첫 유럽여행을 준비할 때 나는 다방면으로 준비를 했다.

유럽여행의 테마가 거의 미술관 기행이었으므로 유럽의 주요 미술관에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으며

그림과 작가에 대해 미리보기 했고, 유럽을 무대로 한 영화들을 챙겨보기도 했다.


그리고 각 나라별로 특징 있는 음악들을 선곡 해 MP3에 넣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를 들면 파리에서 들을 드라마 <파리의 연인>

OST 라던지, 오스트리아에서 들을 모차르트 라던지, 피렌체에서 들을 냉정과 열정사이 OST 등등

일정에 맞게 각 나라에 어울리는 음악들을 선정해 MP3에 차곡차곡 넣어놨는데...

정말 기이하게도!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MP3가... 유럽행 비행기 안에서 작동을 멈춰버렸다.

아무리 눌러보고 껐다 켜보고 해도 안 되었다.

결국 유럽 여행 중 준비해 간 곡들 단 한 곡도 들을 수 없었다는 슬픈 이야기.


그런데 유럽은 사실 이어폰 따위를 귀에 꽂을 일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길거리에, 지하철 역에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수준 높은 연주들.

그리고 그 연주와 어우러지는 거리의 분위기.

그 모든 것을 오감으로 느끼려면 당연히 이어폰 따위는 필요 없다.

거리연주자들 - 이들의 CD는 지금도 즐겨듣는다 - 오스트리아 빈


2011년 남편이 런던으로 해외 파견 가는데 따라가서 런던에서 혼자 1달 정도 여행한 적이 있다.

거의 매일 혼자서 돌아다니다 보니 한국에서처럼 이어폰을 꽂고 다니기 일쑤였는데...

런던에서도 역시 길거리 어디서든, 연주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이어폰은 버스에서만 사용하게 되었다.

런던에서 나는 지하철보다는 주로 이층 버스를 이용했는데 버스 노선도가 쉽게 되어있기도 했고, 이층 버스는 예쁘고, 이층에 타서 맨 앞에 앉으면 관광버스가 따로 없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위에서

런던 시내를 샅샅이 훑을 수 있었던 이층 버스.



이층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 난 항상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 날 그 날 끌리는 음악을 들었는데, 당시 내가 가장 즐겨 듣던 음악은 뜨거운 감자의 <고백>이었다.


사랑을 고백하는 순수한 마음이 담뿍 담긴 그 가사가 좋아서, 그 설레고 어색한 마음이 담긴 목소리와 멜로디가 좋아서 즐겨 듣던 그 노래.


2층 버스에 앉아 그 노래를 자주 들었더니,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2층 버스에서 본 런던의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빌딩들, 나무들, 표지판들, 그리고 사람들...

음악이 풍경을 기억해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어폰이 꼭 필요한 순간이 왔다.


비틀즈가 앨범 표지 사진을 찍은 길로 유명한 애비로드[Abbey Road]를 찾아간 날이었다.

그곳에서 나와 같은 관광객들(비틀즈 팬들?)이 비틀즈와 똑같은 포즈로 횡단보도에서 사진 찍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차가 다니는 길이라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아 보였지만, 친구들끼리 혹은 낯선 사람들끼리 그 장면을 연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름 차들도 그 사진 찍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천천히 오고, 기다려주고 그랬다.

비틀즈의 앨범자켓 사진



나는 일행이 없어 직접 그 사진 속 주인공이 되진 못했지만,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그 흥분된 분위기를 함께 느끼고, 함께 누릴 수 있었다.

그 왁자지껄한 느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주저 없이 아이폰을 꺼내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비틀즈를 듣기 위해서...


비틀즈를 생각하고 그들을 따라 하며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비틀즈의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비틀즈의 녹음실 앞까지 걸어가 그 많은 사람들의 낙서 속에 내 낙서를 하나 보탰다.



비틀즈를 생각하며 걸었던 그 길, 그 나무들, 그 사람들, 그 공기...

그곳을 생각하면 그때 들었던 비틀즈의 음악이 내 귀에서 자동재생된다.

또한 반대로 비틀즈의 음악을 들을 때 그곳의 풍경들도 내 눈 앞에 자동재생된다.


그냥 잊혔을지 모를 순간의 이미지들이 음악과 함께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

내 기억 속 한 순간 한 순간을 자동재생시켜주는 음악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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