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뛰고 있었는데 일어서는 것부터 다시 하라고 한다
8세 이후로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학교를 안 가도 되는 1년이 생겼다. 무엇을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을 하다가, 평소의 생활패턴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배드민턴 오전반에 등록을 했다.
물론 배드민턴은 내가 좋아하는 종목은 아니다. 나의 배드민턴 경력이라고 하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체육 수행평가에서 'E'를 맞은 부끄러운 과거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이 왔다 갔다 하는 횟수가 바로 평가에 반영되는 시스템이었기에 실력자 친구들은 나처럼 공과 상관없이 채를 휘두르는 인간과는 짝이 되고 싶지 않아 했고, 서로가 미안하지 않게 실력대로 맺어준 짝꿍이랑은 연습이랄 것도 할 것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공을 그저 바라만 보며, 최종 평가에서 3번은 쳤을까? "니 채는 뚫려있냐?"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꾸준히 들은 나로서는 그다지 놀라운 결과도 아니긴 했다.
이런 내가 배드민턴을 배우게 된 것은 정말로 100% 남편 때문이다. 서느니 앉고, 앉느니 눕는, 우리 집의 소파인 내 남편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운동이 바로 이 배드민턴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안 맞아도 이렇게까지 안 맞는 사람을 맺어 한 집에 살게 하시다니! 내 남편은 육아휴직을 하는 기간 동안에 월수금 오전반에 등록해서 미리 입문을 한 경력자이다. 올해는 우리가 그토록 그리던 부부가 함께 쉬는 안식년이자, 남편이 그토록 기다린 배드민턴 파트너 본격 양성기간인 것이다.
1일 차 (3월 5일)
그동안 내가 채를 잡은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배웠다. 손바닥이 라켓의 넓은 부분이 아니라 좁은 부분을 감싸 쥐어야 한다고 한다. 넓게 잡았을 때는 그래도 10번은 왔다 갔다 했는데, 좁게 잡으니 2번도 치기 어려웠다.
그동안 내가 공을 치던 방법도 잘못되었다고 한다. 팔꿈치가 아니라 어깨를 써서 때리라고 했다. 공이 없이 하나, 둘에 맞추어서 하이클리어를 치는 동작만 30번 넘게 반복했다.
분명히 배우기 전까지는 뛰어다니던 것 같은데, 일어서는 방법부터 틀렸다고 한다. 다시 일어서보니 한 발짝도 못 내딛겠다. (기세 -200)
2일 차 (3월 7일)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초보 5명 중에 내가 제일 폼이 좋다는 것이다. 물론 의미 없는 비교이긴 하다. 코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자세는 엄청 오래 교정해 주시는데, 나에게는 "잘하고 계세요~"라고 말하고 지나간다. 왼발을 뛰며 클리어를 치는 자세도 배웠는데, 뭔가 배드민턴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자세 같다. 괜히 오버해서 뛰고, 괜히 오버해서 팔을 휘두르게 된다. 혼자 멋진 척은 다 하며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초심자 5인 중 한 명으로 레슨을 마친다.
실제로 공을 쳐보니 그래도 2번은 맞는다. 바꾼 폼이 어색하지만, 그래도 2번 만에 2번 때릴 수 있으면 대단한 게 아닌가 하며, '30년 만에 발견한 새로운 재능인가? 난 역시 재능형?'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재능 +20)
3일 차 (3월 10일)
월요일은 잔인해. 금요일엔 잘 맞던 게 월요일엔 안 맞는다. 어째서 성장은 꾸준히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계단식 성장만 돼도 좋겠다. 어째서 1보 전진하고 2보 후퇴하느냔 말이다. (기세 -50)
그래도 레슨을 받을 때는 늘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멋지고 성실하게 한다. 나는 지금 되게 멋진 사람이야, 이 중에 내가 젤 멋져, 이런 생각을 하며 운동을 하는데, 혹시 다들 이런 지 궁금하다.
백발이 성성한 아저씨께서 멍하니 있는 나의 상대가 되어 주셨는데, 굉장히 곤혹스러워하셨다. 되게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고. 팔만 움직이면 되는데 왜 온몸이 움직이고 있냐며, 나머지를 좀 가만히 있어보라 하셨다.(뭔데요,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어떻게 사람이 팔만 움직여요!) 하지만 동작을 크게 해 보라는 조언은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스킬 +3)
남편은 내가 공을 치러 갈 때 복싱 스텝을 밟는다고 했다. 배드민턴에는 그런 스텝이 없다고. 하지만 난 아직 배드민턴 스텝을 배우지 않았는걸. 복싱은 2년이나 배웠다고.
4일 차 (3월 12일)
승모근이 이렇게 아파도 되나 싶다. 누르면 '악' 소리가 절로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흐아앙악' 정도의 괴성을 지르며 몸을 꼬게 된다. 한의원에 가서 침 한방 맞고 올까 잠깐 고민했지만, 진정한 운동인은 뭉친 근육을 운동으로 푼다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체육관으로 향한다. (기세 +100)
모든 운동의 공통점은 고인 물들이 뉴비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인 물든 나에게 늘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고, 나는 가르침의 홍수 속에서 빠져 죽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팔을 더 위로, 타점을 높게 잡아봐요, 탕소리가 아니라 텅 소리가 나야 해, 아냐 조금 빨랐어, 처음엔 원래 다 그래, 한 번만 더 칠게요, 준비자세에서 팔 안 떨어지게, 지금 정수리에서 치고 있잖아, 공을 오른쪽에 두세요, 힘을 빼고 맞기만 해도 나간다니까?, 멀리 보내려고 해 봐요, 맞는 것보다 자세가 더 중요해, 서브는 대각선으로 넣어야지, 어깨 힘 빼고, 방금 잘 맞았는데 이대로만 하면 돼요, 조금 쉬었다 할까요?
네. 제발요. (압도적 감사 +500)
5일 차 (3월 14일)
그간 수준별 훈련만 했는데, 처음으로 단체 훈련을 했다. 배드민턴 공 5개를 스텝을 밟으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이렇게 쓰니까 정말 간단한 훈련. 하지만 이것은 나의 오른쪽 엉덩이를 조져놓았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정말로 쉽게 사람을 골로 보내는 방법을 아는 것 같다.
주말 동안 운동으로 뭉친 근육은 운동으로 풀기 위해 계단으로 14층과 19층을 올랐단 사실! 하지만 그럼에도 엉덩이는 풀리지 않았고, 배드민턴은 하체운동이었다.
6일 차 (3월 17일)
월요일, 월요일, 월요일! 월요일은 출근도 싫고 운동은 더 싫다. 또 한 번 후퇴한 나 자신을 확인하는 괴로운 시간. 땅에 떨어진 배드민턴 공을 빠르고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스킬만 늘었다. 그래도 나름의 성장이라면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1) 복싱 스텝 안 밟고 제자리에 서서 공칠 줄 알게 됨
2) 방송댄스로 다져진 골반 움직이지 않고 필요한 동작만 할 줄 알게 된(다고 생각함)
3) 분명 맞아야 할 공인데 안 맞으면 소리 지르면서 자신에게 화 낼 줄 알게 됨
4) 겸손해짐
7일 차 (3월 19일)
자세가 완전히 좋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거 제가 예전에 문선(문화선동이라고 민중가요에 맞추어서 춤추던 뭐 그런 것들이 있었었다. 투쟁할 때마다 앞에 나와서 춤추던 '걔'였음.)하던 애라 각은 칼각입니다. 자세는 거의 퍼펙트가 맞는데, 오늘 코치님께 들은 대사들을 적어보겠다. (감동 실화)
- 지금 공 보고 치시는 거 맞죠?
- 1번 동작(시범)이 맞을까요? 2번 동작(시범)이 맞을까요? 아, 차이를 모르시겠어요?
- 방금 공치는 타이밍이 느렸나요, 빨랐나요? / 느렸어요./ 아뇨, 빨랐죠.
- 높이 지나가면 빠른 거고, 낮게 지나가면 느린 겁니다. (당연)
그리고 (이제는 3명이 된) 초심자들의 대사들
- 이해했어요. 이해는 돼요. 몸은 안 돼요.
- 하이클리어만 3월 내내 하는 건가요?
- 왜 맞은 거죠?
- 모르겠는데요.
- 4월에 재등록할 거야..?
코치님은 굉장히 친절하시고 상냥하신데, 우리의 잘못들을 너무 잘 복사해서 따라 해주셔서(킹 받게) 효과적인 거울치료를 매번 하고 있다. 외국에 나가면 웃음이 많아지는 것처럼, 체육관에 가면 웃음이 많아진다. 외국 나가면 쏘리, 스미마셍을 입에 달고 사는 것처럼, 체육관에서도 미안하고 죄송한 일들이 너무 많다. 아, 체육관은 나에게 외국과도 같았구나! 하지만 진짜 쪼오오오오오오끔씩 성장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내일모레 마흔에도 새롭게 배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열심히 다녀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