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무늬 Nov 12. 2019

지독하게 사랑해서 지독하게 헤어져야 했던

[픽션에세이] 그런사람이있었다

<여자 이야기>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납득시키라는 그에게

세상에서 제일 못된 여자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정도 없이, 조목조목 따져가며 말했다.


날카로운 니 눈빛이 싫다고,

이기적인 니 성격도 싫다고,

처음엔 그렇게 추상적인 얘기들만 하다가, 나중엔,

같이 영화 보러 가면 절반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도 짜증나고,

맨날 모자 푹 눌러쓰고, 후줄근한 똑같은 잠바 입고 나오는 것도 싫고,

바지 뒷주머니에 불룩하게 담배랑 지갑 넣고 다니는 것도,

밥 먹을 때 속도도 맞출 줄 모르고 혼자 먹어치우는 것도 보기 싫다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유들까지, 다 얘기해버리고 말았다.


말 하다 보니, 두 사람의 시간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아

조금 창피해졌지만... 

이미 싫어진 그를 견디는 것보단, 

잠깐 동안 이 창피한 순간을 견디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말 해놓고 그녀는, 조금 불안했다.

혹시라도 그가... ‘내가 다 잘못했으니 고칠께’라고 말하면 어쩌나...

눈빛도 부드럽게 바꾸고, 영화보러 가도 안 졸고, 담배도 끊고 밥도 천천히 먹겠다고,

그러니 헤어지잔 말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면 어쩌나...

생각만 해도 구질구질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웃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나갔다.

안 그래도 얘기하는 내내, 어떻게 해서든 그와 헤어지려는 모습이 참 구차하게 느껴졌는데,

그가 그녀를 두고 혼자 나가니, 더더욱,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


<남자 이야기>


끝까지 거짓말뿐이구나 너는...

난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그냥, 모른척하고 기다리면, 니가 마음을 접을 줄 알았는데...


벌써 몇 달째, 바쁜 일 생겼다며 급하게 약속 취소할 때마다,

집에 일찍 들어가야 된다며, 매일 가던 집 근처에 따라오지도 못하게 할 때마다...

내가 어떤 상상을 하면서 널 기다렸는지, 너 같은 애가 알 리가 없지...


그냥 다른 사람이 나보다 좋아졌다고 말해버리면 될 것을... 참 못됐다...

너 하나 못된 사람으로 남기 싫다는 이유로, 이렇게 나를, 만신창이로 만드는구나...


니가 나한테 했던 말 중, 어떤 말이 진짜고, 어떤 말이 거짓말이었던 걸까...

내가 어두운 사람이어서 좋다고, 니가 햇빛처럼 나를 비춰주고 싶다던 말?

아니면, 내가 지하실 곰팡이처럼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말?

내가 가난한 사람이어서 좋다던 말?

아니면, 지지리 궁상떠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말?


이제 어쩌나... 앞으로 나는, 니 말처럼 그렇게 믿고 살 텐데..

내가, 정말 추레하기 짝이 없고, 자신감이라곤 눈꼽만큼도 없고, 

이기적이고, 멍청하고... / 나는 앞으로 내가, 그런 남자인 줄 알고 살 거거든...


맞아, 이건 저주야.

내 인생이 꼬이면, 그건 너 때문이라는 저주.


거짓말쟁이, 마녀, 독해 빠진 여자, 감정도 없는 메마른 여자...

내가 지금 우는 건, 

너처럼 못 되먹은 여자를 좋아했던, 지난 시절에 대한 후회 때문이야.

절대로, 마음이 아파서가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


지독하게 사랑했던,

그래서 더 지독하게 헤어졌던...

그런 사람이,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그 골목을 지나는게 아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