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사진기 하나 없으면서 은행 퇴직 동우회 사진부를 따라나섰다. 이미 청산도를 한 번 다녀왔고 이번이 두 번째로 영광 불갑사의 꽃무릇 축제가 오늘의 출사 현장이다. 기껏해야 핸드폰으로 찍는 사진이지만 그래도 기죽지 않고 용감하게 길을 나선다.
서울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일정이라 오늘도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희끄무레한 하늘이 새로운 날의 기대를 담은 듯 살짝 가슴이 뛴다.
7시에 교대역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아침은 김밥이 준비되어 시장한 김에 두 개나 먹었다. 그간 밀려 둔 막바지 스페인 여행기를 핸드폰으로 쓰다 졸다 시간을 보낸다. 잿빛 하늘이 비를 잔뜩 머금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다. 우비를 준비했지만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최근 비로 금강에 물이 불어나 강물이 그득하다.
금강
11시가 다 되어 불갑사 입구에 도착했다.불갑사를 품은 불갑산의 원래의 이름은 모악산으로 아늑한 산의 모습이 마치 모든 산의 어머니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백제시대에 이르러 불교의 불자와 육갑의 갑자를 더하여 불갑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불갑산과 불갑사
불갑사의 역사도 참으로 유구하다. 삼국시대에 백제에 불교를 전파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불갑사 들어서기 전부터 길가에 핀 꽃무릇이 보인다.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어서 꽃이 덜 피었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꽃구경하기 딱 좋은 제대로의 시기였다.
꽃무릇은 백합과의 다년생 화초다. 상사화와 유사한 면이 많아 붉은 상사화라고도 하지만 정확한 이름은 꽃무릇 혹은 석산이다. 상사화가 우리나라가 원산지임에 비해 꽃무릇은 중국이 원산이다. 꽃이 먼저 피어나고 진 후에 잎이나서 한겨울에도 푸르다. 반면 상사화는 잎이 먼저 나고 그 후 꽃이 핀다. 꽃무릇은 열매를 맺지 못해 비늘줄기로만 번식한다.
꽃무릇
축제를 알리는 장식이 불갑사 일주문에 세워졌다. 꽃무릇을 든 여인의 자태가 고혹적이다. 입구를 지나자 곧바로 산허리 그늘진 곳에 꽃무릇이 꽃단장한 색시처럼 수줍게 모습을 보인다. 그늘진 곳과 습한 곳을 좋아해 나무가 우거진 곳에도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다.
사진에 담느라 발길이 바쁘다. 하지만 이곳은 그야말로 약과였다. 오솔길을 따라 수없이 많은 붉은 꽃들이 주단을 펼친 듯 황홀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운 여인의 긴 속눈썹 같은 긴 꽃술이 참으로 매혹적이다. 잎이 없으니 더욱 가녀린 여인의 우아한 자취를 가졌다.
사람들 입에서 예쁘다는 말이 녹음기를 재생해 놓은 듯 여기저기서 들린다. 경치를 찍느라 멋진 자세로 꽃과 자신을 사진에 담느라 모두가 바쁘다.
살아생전 이렇게 많은 꽃무릇을 볼 줄이야!
정말로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너른 빈 공간이 온통 꽃무릇 천지다. 날이 흐려 꽃이 보여주는 장관을 선명하게 사진에 담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금 아쉽다. 빛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색감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기때문이다.
조금은 특별한 사진을 찍기 위해 여러 각도로 구도를 잡아 본다. 색감도 중요하지만 구도를 잘 잡는 것도 이에 못지않다. 핸드폰이라는 제약이 있지만 최대한 장점을 살려 멋지게 담으려는 노력을 쏟았다. 물에 비친 반영을 잡으려 시도도 해보고 한 두 송이도 클로즈업을 해서 찍어본다. 좋은 작품 사진을 찍기에는 역부족이지만 그래도 찍은 사진을 보니 마음이 흐뭇하다.
질릴 정도로 수많은 꽃무릇을 뒤로하고 불갑사 경내로 들어섰다.불갑사 대웅전은 여섯 번의 중건을 했다. 지금의 대웅전은 조선후기 사찰 건축의 수작으로 꼽히며 안치된 목조여래삼존불은 조선 후기 목조 조각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한다. 창살문의 섬세한 조각도 더불어 아름답다.
대웅전
경내에는 700여 년이 된 참식나무가 위엄을 갖추고 서 있다. 녹나무과의 상록 교목인 참식나무는 사찰 뒤편에 자생지가 있다. 지나온 세월의 더께가 수피에서 전해진다. 절 뒤편으로 올라가 보니 산 자락에도 꽃무릇이 피어있다. 눈을 두는 곳 어디나 꽃무릇 세상이다.
700년 수령의 참식나무
정해진 시간에 버스를 타야 해서 돌아서는 마음이 바쁘다. 운 좋게 꽃에 앉은 긴 꼬리 제비나비를 찍었다. 몇 번 기회가 있었지만 그 순간을 잡지 못했는데, 이 녀석은 천연덕스럽게 바로 앞에서 여유를 부린다. 내려오는 길에는 구름사이로 햇살이 비쳐 아까와는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또다시 바쁘게 사진에 담는다. 스님 한 분이 홀로 걷는 모습이 꽤나 운치가 있어 재빨리 사진에 담았다.
긴꼬리제비나비
빛을 온몸에 받는 꽃의 생기는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반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저 햇살처럼 나도 남들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행복한 꽃의 여행을 마쳤다. 마음껏 꽃밭을 누렸다. 꽃무릇의 붉은빛이 마음을 온통 붉게 물들인다.
다리운동 눈 운동에 지치니 시장기가 몰려온다. 점심은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푸짐한 남도의 한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