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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빛의 세계를 유람하다-남정 박노수 미술관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관람기

by 정석진

종로구 서촌 역사 기행을 하는 길에 박노수 화백의 미술관에 들렀다.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은 그전에 알고 있었지만 기회가 닿질 않다가 생각지 않은 때에 미술관 앞을 지나게 되었다. 숲해설가 동기들과 서촌 역사기행을 하는 여정이었다. 예전부터 그의 그림을 보면서 그의 독특한 화풍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박노수미술관 입구

그의 그림은 동양화 특유의 여백미가 깃든 담백한 화면에 강렬한 색감이 깊은 인상을 준다. 등장인물이 한가로이 노니는 작품이 단박에 박남수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했다. 그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그의 유유자적한 그림을 접할 때마다 그의 미술세계에 매료되었다.


박노수 미술관은 1937년에 지어진 절충식 건물로 서양식, 일본식, 한식이 어우러진 독특한 양식을 지녔다. 본래는 친일파 윤덕영이 딸을 위해지어 준 집이라고 한다. 이 건물을 박화백이 1973년에 구입하여 40여 년을 지내며, 정원을 지성스럽게 가꾸고 수석으로 장식하여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고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로 등록되었다.

미술관 전경

2층으로 되어있는 건물내부는 목재와 회벽이 어우러져 깔끔하다. 숲이 내다 보이는 창이 달린 아담한 다락이 정겹다.

미술관 실내/다락

건물 주위에는 기기묘묘한 암석들과 자연을 축소해 놓은 듯한 많은 수석들이 눈길을 끈다. 또한, 석등과 직접 디자인한 석조물과 나무와 꽃들이 세심하게 가꾸어진 저택의 정원도 볼만하다. 후원의 언덕을 올라서 전망대에서 내려보는 조망도 또 다른 볼거리다.

미술관은 그다지 넓지 못해 많은 작품이 전시되지 않았다. 그래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지 않아 아쉬웠다. 미술관에는 박화백의 기증작품과 컬렉션(고미술품, 수석, 고가구)등 천 여점이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그래서 3개월을 주기로 작품을 기획하여 전시한다고 한다.


그는 관념 산수화를 그렸다. 하지만 '전통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으로 동양화의 현대성을 모색하여 새로운 화풍을 개척했다.'라고 알려졌는데, 모던한 분위기와 자유롭고 거침없는 붓의 터치가 색다른 동양화의 세계를 선보인다.

류하

이번 전시의 대표적인 작품은 '류하'로 버드나무 아래라는 화제를 달았다. 코발트블루의 파란색이 두드러진 그림으로 진하고 대담하게 채색된 버드나무 잎의 늘어진 가지가 화폭을 가득 채운다. 1980년에 제작한 이 그림은 그의 독특한 화풍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인 버드나무가 가지고 있는 녹색과는 차별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버드나무를 짙푸른 남색으로 표현했다. 유화 느낌이 묻어나는 진한 필치는 한여름의 시원함을 선사한다. 자연을 그렸지만 도회적인 세련된 감각과 독특한 색감이 다소 몽환적이기도 하다.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맑고 고요한 그림 속 세상으로 깃들여 머물도록 이끈다.

해설사의 설명 중에 박노수 화백이 채색화가 왜색으로 여기고 있는 우리 그림의 분위기를 일신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측면으로 시선을 표현해 관람객에게 평면적인 그림에 공간감을 부여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는데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과 동물들이 그림에 생동감을 부여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의 여유를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박목월 시인의 시에 담긴 청산과 청노루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납량고하

납량 고하(늙은 나무 아래서 더위를 피하다)는 위 작품의 일련 선상에 있다. 역시 코발트블루는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고 고목의 줄기는 간결한 필치로 그려졌다. 나무 그늘 아래는 부채를 든 남성이 한가롭다. 색을 단순하게 쓰면서도 그림은 단조롭게 보이지 않고 다채롭게 보인다는 것도 신기하다.


나무 아래라는 제목을 가진 그림들이 꽤 많다. 풍기는 분위기는 비슷하다. 진한 남색이 청량감을 주면서 흰 여백과 어울려 간결함을 전한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여유롭다. 분주한 삶의 현장에서 한 걸음 물러난 휴식과 쉼의 공간이다.

수하

시대가 지나갈수록 그의 그림은 더욱 간결해진다. 취적은 1989년에 그린 작품으로 선과 색이 더 단순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남색 사랑은 여전히 그림의 중심이다.

취적

그림에 남색이 보이지 않는 작품도 보인다. 쓱쓱 그리듯 자유로운 필치와 간결한 색상이 담겼다. 강물의 조각배에는 한 남자가 앉아있는 데 분위기가 한가롭고 평화롭다. 그림에서 강이 그림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작은데도 불구하고 채색을 하지 않고 여백으로 남겨 공간을 확장시킨다.


가을 풍경이 물씬 풍겨 나는 작품도 보인다. 추색을 담은 붉은 색감이 화려하게 물든 단풍을 떠올리게 한다. 그림에는 자연을 즐기는 한 사람이 등장하여 그림에 생명을 담는다.

포도는 다른 경향의 작품이다. 포도 잎은 물감의 농담으로 표현하고 덩굴손은 사방팔방으로 손을 뻗고 있다. 포도는 푸른빛으로 영글었는데 엷은 남색이 그의 특징으로 담겼다. 뒤를 돌아보는 노루 한 마리가 동양의 미를 보여준다.


그간 피상적으로 알았던 박노수 화백의 그림들을 직관하며 그에 대한 지식들을 넓히게 되어 기쁘다. 채색화이면서 간결한 동양화의 여백미가 살아있는 그의 그림들이 마음으로 다가왔다.


그림을 감상한 후 전시된 수석을 돌아보았다. 많은 수석들이 그가 탐석에 열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자연의 축소된 모습을 품은 암석들이 경이롭다. 언덕에도 올라 전망대에서도 경치를 감상했다. 미술관 주변 경관을 둘러보며 그가 자연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자연에 대한 사랑이 그의 작품에 오롯이 담겨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화가의 진심이 보는 이들에게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박화백의 손길이 담긴 수석과 정원

미술관을 둘러보고 서촌기행을 했다. 서촌은 왕손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고 이어서 사대부들이 들어섰으며 중인들이 그 후를 이어 주류가 되면서 우리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일일이 역사의 흔적을 밟아가며 그 안에 담긴 생생한 역사를 배우는 시간이 아주 알차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물론 박남수 미술관을 관람하며 그의 그림을 좀 더 알게 된 점도 큰 즐거움이었다. 알찬 하루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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