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영월의 풍광과 맛에 젖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버스를 타고 강원도 영월로 문화답사를 나섰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동서를 가르는 38번 국도로 들어섰다. 38번 국도는 당진에서 동해안 바다까지 이어진 길이다. 영월은 석회암 지대로 시멘트 공장이 많아 도로 훼손이 심해서 보수 공사를 수시로 해줘야 한다.
영월이라는 지명에는 첩첩산중의 심심산골 험지를 평안히 넘어가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골 깊은 산길을 돌아 단종의 왕릉인 장릉을 맨 먼저 돌아본다.
단종은 12살 어린 나이에 왕에 즉위하지만 수렴청정할 왕실 어른들이 없어 중신들이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이에 세조는 왕권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권을 탈취한다. 결국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17살에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다. 창령포에서 두 달여만에 홍수로 거처를 옮겨 지내다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사사를 받게 되고 시신조차 강물에 유기된다.
단종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인 세종대왕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문종이 승하한 이후로 정쟁의 제물로 왕위도 빼앗기고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영월은 단종의 슬픈 역사가 곳곳마다 서려있는 곳이다.
영월에 왕릉이 들어선 이야기도 애틋하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단종은 죽음을 당한 뒤에 시신도 수습이 되지 않던 차에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내걸고 영월 호장 엄흥도는 시신을 수습해 후에 장릉이 되는 곳에 암장을 한다. 후대에 그의 충절을 기려 정려각을 세운다. 그는 양반도 아닌 중인이었다. 그 일 후로 그는 영월을 떠나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고 한다. 단종은 죽은 지 241년이 지난 숙종 24년에 복권이 되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을 하나 둘 떨군다. 차가워진 날씨가 더욱 을씨년스럽다. 제법 물든 단풍이 무채색 풍경에 색감을 더한다. 기념관의 어진과 운보 김기창화백이 그린 단종의 모습이 왠지 애처롭다.
이곳 장릉은 여타 다른 조선의 왕릉과 많이 다르다. 애초에 암장한 곳을 후에 왕릉으로 꾸며 제각과 능이 떨어져 있고 능의 묘석도 초라하다. 심지어 무인석조차 없다. 그렇지만 다른 능에 비해 제각들의 규모가 크고 다양하다. 후대에 지어진 건물로 장판각은 단종을 위해 죽임을 당한 충신을 비롯한 여인들까지 268인의 위패를 모신 곳이 있고 엄흥도를 기리는 정려각도 있다.
산길을 올라가 산마루에 있는 왕릉을 보니 측은한 생각이 절로 든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청령포다. 이곳은 삼 면이 강이고 다른 한쪽은 기암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요새로 단종이 유배된 곳이다. 청령포로 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청령포 들어서는 산기슭에 꽃향유가 무더기로 피어있다. 비를 맞아서 보랏빛이 선명하다.
유배지 주위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 숲을 이루고 있다. 맑은 날에 오면 걷기에 그만일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다. 하늘까지 자란 고목들이지만 단종 시대의 나무는 딱 한 그루가 남아있다. 관음송이라고 이름을 지닌 30미터 높이의 거목이다. 보기에도 대단한 위용을 지녔다. 최근 들어 복원한 한옥 터에 담 밖에 자라는 소나무가 건물 안으로 굽어진 모습도 독특하다. 호장 엄흥도 나무라고 하는데 지은 이야기지만 왠지 그럴듯하게 들린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영월 팔경 중 하나인 선돌에 들렀다. 서강이 흐르는 절벽에 기암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강물과 너른 벌판이 잘 어울린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빚어낸 풍광이다. 곳곳에 절경들이 깃든 영월은 참 아름다운 고장이다.
점심은 '산속 친구'라는 농가 맛집으로 갔는데 자연조리법으로 만든 천연밥상이었다. 물냉이와 민들레 등, 산야초로 만든 샐러드가 달콤한 효소에 버무려져 쓴 맛의 나물과 잘 어울렸고 3년 묵은 김치와 손두부도 좋았다. 떡갈비와 코다리로 영양의 균형을 맞추고 7년 된 씨간장과 죽염 고추장으로 비빈 산채비빔밥도 입맛에 맞았다. 곁들인 어수리 된장국은 먹기 아까울 정도였다.
아주 흐뭇한 식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산을 두른 운무가 신비롭다. 산봉우리가 구름에 잠겨 섬이 되었다
개쑥부쟁이도 풍성하게 피어 배 부른 풍경이다.
조금 거세진 비를 뚫고 선암 마을에 있는 한반도 지형을 보러 갔다. 산길을 800여 미터 올라가 특이한 토끼 모양의 지형을 눈으로 맞이한다. 날이 흐려 제대로 된 조망이 어려웠어도 한반도 지형을 축소해 놓은 듯한 풍경이 신기했다. 그곳에서 반가운 야생화를 발견했다. 꽃이 작고 초라했지만 남한산성에서 본 자주쓴풀이었다.
운무에 가려진 풍경이 그럴듯했어도 맑은 날이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푸념도 들었다. 하산하는 길에 여기저기 산국이 피었는데 칡 속에 핀 산국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뗏목 배를 타고 서강의 또 다른 한반도 지형을 둘러보았다. 뱃사공의 해학이 담긴 구수한 이야기가 흥을 돋운다. 푸른 강물 그리고 평안한 자연 풍광이 마음을 녹인다. 마무리로 퉁소 소리가 비와 구름과 강안 풍광에 운치를 더한다. 단종의 고장 영월이 마음에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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