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다섯 시간을 걸려 함양을 찾았다. 원래 함양상림에 꽃무릇이 필 때 오자는 약속을 했었지만 오늘에야 오게 된 것이다. 사전에 계획이 없이 의기투합한 세 부부가 바람 따라 가을 여행에 나섰다.
함양에서 서로 만나 읍내에서 점심으로 어탕국수를 먹었다. 민물고기를 삶아 살을 걸러낸 진한 국물에 재피를 넣어 특유의 향이 나는 국수는 차가워진 날씨와 너무 잘 어울렸고 아침도 거른 시장한 속을 뜨끈하게 채워 주었다.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함양상림으로 향했다.
숲을 찾은 이유는 맨발 걷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천년의 숲 함양상림에는 개서어나무와 갈참나무 그리고 상수리나무, 나도 밤나무 그리고 사람주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 활엽수로 이루어진 숲이다. 울창한 숲 사이로 꽤 긴 거리를 맨발로 걸을 수 있는 흙길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찾는다.
발 씻는 장소에 신발을 벗고 걷기를 시작했다. 비 온 후 흙이 씻겨나가고 모래 알갱이가 드러난 단단한 땅은 정신이 번쩍 나도록 내 발바닥을 찔렀다. 아프다는 신음이 절로 나왔는데도 동행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구름에 달 가듯 자연스럽게 걷는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절뚝거리며 뒤를 따르는 길에 맑은 바람소리가 숲을 흔든다.
큰 고목 밑에는 꽃이 지고 난 꽃무릇의 싱그러운 새싹이 봄인 양 파랗게 자라났다. 소담스럽게 자란 푸른 잎들이 꽃이 피었을 때 얼마나 볼만했을지를 가늠하게 했다.
길바닥에는 벌써 낙엽들이 땅에 깔려 가을 분위기를 풍기지만 단풍은 아직 들지 않았다. 발바닥은 비명을 지르고 있어도 숲길은 걷기에 그만이었다. 눈 닫는 곳 어디나 푸른 숲이 여전하고 새소리와 물소리가 귀에 가득해 번잡함을 벗어난 완전히 딴 세상에 들어온 느낌이다.
엉거주춤 걸으며 느긋하게 경치를 즐기다 보니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천년의 기상이 어린 숲을 맨발로 느끼며 걷는 길이 사랑스럽다. 한참 뒤 먼저 간 이들을 오가는 길에서 다시 만났다.
되돌아가는 길은 오던 길과 다른 길로 간다. 물소리 재잘거리는 계류를 끼고 걷던 길에 갑자기 꽃밭이 마치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상림 숲 옆 광활한 터가 꽃들의 세상이다. 비록 노랑코스모스는 거의 다 졌지만 그 곁에 작은 꽃송이들이 수없이 달려있는 버들마편초가 만발한 들판은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검붉은 빅베고니아와 노란 메리골드 그리고 안젤로니아, 숙근사루비아가 공간을 가득 채워 명랑한 원색이 일렁인다.
깊고 파란 가을 하늘 아래 휘황한 꽃들의 향연이 깜짝 선물로 주어졌다. 이 절경을 놓치고 간 동행들을 불러 축제에 동참시킨다. 모두 다 즐거워하여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맑은 가을 쾌청한 날, 눈부신 풍경이 꿈결처럼 신비롭다.
꽃밭이 끝나는 곳에 연꽃밭이 넓다. 연꽃은 이미 졌지만 열대 연꽃들이 꽃봉오리를 내밀고 있다. 또 하나의 볼거리로 즐거움을 준다.
기대하지 않은 꽃과의 만남에 기쁨은 커지고 마음은 부자가 되어 부러울 것이 없다. 먼 길을 왔지만 수고는 이미 보상이 차고 넘친다. 아름다움은 아직도 계절을 보내지 못한다. 사그라들기 직전의 불꽃처럼 가을꽃이 화려하다.. 바람은 차지만 마음에는 훈풍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