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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에 올라 눈꽃에 빠져 들었네

태백산 등정기

by 정석진

새해가 얼마 지나지 않아 태백산을 올랐다. 처음 가는 길이었고 겨울 산행이라 우려와 기대가 반반으로 갈까 말까 망설임도 있었다. 하지만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우려를 떨치고 등산에 나섰다.


태백산은 민족의 영산으로 1,567미터 높이의 오르기가 만만치 않은 산이다. 서울에서 출발해서 버스로 가는 시간이 무려 4시간이 걸린다. 오늘은 눈 예보도 있었다. 오가는 길도 쉽지 않을 듯해서 걱정이 되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시작부터 피곤했다. 당일치기 여행의 대가다. 평소 임박해서 움직이는 까닭에 시간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유를 누리고 싶어 전철 시간에 맞춰 기분 좋게 일찍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뿔싸! 나는 준비가 되었는데 상황은 아니다. 사람은 늘 하던 대로 살아야 하나 보다. 미리 준비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분명히 시간을 확인했는 데도 정작 전철이 제시간에 안 오는 거다. 결국, 피같이 귀중한 새벽 10여분의 시간을 허무하게 흘려보내야 했다. 그 결과로 또다시 아슬아슬한 시간을 맞닥뜨린다.

겨우 버스를 타고 모자란 잠을 차에서 보충하며 갔다. 도중에 아침 식사를 했다. 한겨울 눈 내린 산을 오르기에 든든한 식사가 필요했는데 아주 좋은 준비가 되었다. 겨울 산행을 해본 적이 드물어 개인적으로 부담을 안고 가는 길이어서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등산 필수품으로 아이젠과 스패치를 챙겨야 했는데 집에 스패치가 없었다. 휴게실에서 아침을 먹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곳에서 필요한 용품을 사려고 했다. 그런데 휴게소가 아닌 일반 식당이다. 편의점이 곁에 있어 스패치는 살 수 없었지만 아쉬운 대로 물과 간단한 간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

오늘 산행은 유일사 코스로 8.4킬로미터를 걷는다. 정상인 장군봉을 거쳐 당골로 내려오는 여정이다. 유일사 입구에서 버스를 내리자마자 신발에 아이젠을 부착했다. 오늘처럼 눈 쌓인 산길을 아이젠 없이 걷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등산 초입부터 경사가 상당했고 눈도 쌓여 있었다. 아이젠이 제 기능을 다해 하나도 미끄럽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눈에 콱콱 박히는 느낌도 새롭고 좋았다.


날씨는 잔뜩 흐렸다. 하늘에서 눈이 금방 쏟아질 것 같았다. 나목이 옹위한 산 자락에는 눈이 깔려있었다. 계속 오르막 길이 이어진다. 그래도 좀 수월하게 오르는 것은 연초부터 하고 있던 계단 오르기 덕분이다. 매일 21층 계단을 세 번을 반복해서 걷기 중인데 오르는 산길이 마치 계단을 오르는 느낌과 같았다. 상당한 거리를 올라야 했기에 아마도 평소 걷던 계단 오르기보다 강도가 심한 운동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몸도 가볍다.

많이 추울 것으로 생각해 단단히 옷을 입었다. 털모자도 준비하고 목에 두르는 스카프와 후드 티 그리고 오리털 야상을 겹쳐 입었다. 생각보다 기온은 그다지 떨어지지 않았다. 산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땀이 났다. 안에 입은 후드티를 벗고 걸으니 한결 나았다.

산을 올라갈수록 나뭇가지에도 성에가 어렸다. 대부분 낙엽이 진 나무들로 간혹 소나무와 주목이 간간이 보였지만 온통 헐벗은 나무뿐이다. 나무들이 산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어서 나목들만 보여도 스산하지 않고 눈을 배경으로 편안하고 정갈한 풍경이다.

계속 올라가는 산길이 힘겨워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이 빚어내는 풍경도 달라진다. 눈이 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날씨가 흐려 시야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만 남았던 눈이 이제는 나뭇가지에도 어려있다.

봄에만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겨울에도 꽃이 핀다.

산을 오를수록 눈부신 설화가 점점 만발하는 중이다. 관목의 다채로운 여린 가지마다 순백의 눈꽃이 피고 주목과 소나무 잎에도 눈 결정이 뒤덮여 신비로운 자태를 선보인다. 굵은 나무등걸에도 눈의 자취가 서려 붓질로 음양을 도드라지게 그려놓은 듯하다.


이제는 온통 눈 세상이다. 하늘과 땅을 구분할 수가 없다. 하늘이 땅에 그대로 내려앉았다. 눈의 나라에서는 누구나 아이가 된다. 내일에 대한 걱정도 없고 단순히 풍경 속으로 젖어든다. 자기를 잊게 되고 자연의 구성원으로 시간 감각도 무뎌진다. 감탄이 절로 솟는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순수해진다. 동화 속 세상이다.

겨울 왕국에 압도되지만 추위가 낭만을 깨뜨린다.

정상에 다가갈수록 바람이 거세진다. 기온도 뚝 떨어진다. 사진을 찍으려 맨손이 되면 금방 얼어붙을 듯 춥다. 눈발도 날린다. 바람 잦은 곳에 머물며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간식으로 원기를 충전하고 따뜻한 물로 목을 축인다.


아름드리 주목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장대하지는 않아도 튼실하다. 높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으로 외양보다 내실을 다진 것 같다. 푸른 잎마다 얼었지만 의연하기만 하다. 바람을 바로 맞는 주목은 바람 방향으로 자신을 순응해 꼬부랑 할머니처럼 휘어 자란다. 삶의 강렬한 의지다.

마침내 장군봉에 올랐다. 눈보라로 앞은 보이지 않고 주변만 보인다. 많은 이들이 걸은 길이지만 눈보라에 흔적은 없다. 마치 처음 발을 내딛는 기분이다. 선경에 빠져 일행과 뒤쳐진다. 인적이 보이질 않아 이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다. 큰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잡목들만 눈 속에 파묻혀 숨 죽이고 있다. 지나온 길도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끝없는 순백의 눈길이다. 마치 영원으로 들어서는 문 같다.

천제단도 눈의 통치 아래 조용히 앉아있다. 돌로 만들어진 제단이지만 이제는 눈의 일원일 따름이다.

세차게 얼굴을 때리는 눈발에 정상의 위엄이 서렸다. 조신하게 예를 갖추고 하산을 서두른다. 발걸음은 내려가고 있지만 눈길은 자꾸 뒤에 머문다.

올라온 만큼 내려가는 길도 경사가 심하다. 저절로 쏠리는 몸의 중심에 따라 발길도 빨라진다. 미끄러운 눈길이지만 아이젠이 있어 거뜬하다. 난관도 만난다. 등산화가 새것이어서 복사뼈 부분이 까졌다. 오를 때는 몰랐는데 내려갈 때는 신발에 밀려 쓰라리다. 대단치 않은 상처에도 신경은 온통 발에 머무른다.

이토록 단순한 것이 삶이다. 눈이 빚는 풍경에 매료된 게 바로 전인데, 작은 고통에 다 매몰된다.


오후 세 시, 나름 힘든 도전이었지만 무사히 산을 내려왔다. 늦은 점심을 먹었다. 상황오리 백숙으로 푸짐하게 영양을 보충하고 사우나에서 개운하게 몸을 씻고 일정을 마친다. 눈꽃 세상을 다녀온 기쁨이 충만하다. 서울로의 귀경 길이 만만치 않지만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하고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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