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같은 가을날이다. 사실 봄과 가을은 여러모로 닮아있다. 가끔 보면 식물들도 헷갈려한다. 봄에 피는 꽃들이 가을철에 심심찮게 피어나기 때문이다. 바람만 따져봐도 그렇다. 바람의 질을 보면 봄바람과 가을바람은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를 굳이 든다면 봄바람은 찬바람에 더운 기운이 담겨있고 가을바람은 더운 바람에 찬기운을 품고 있을 뿐이다.
더위가 지루하게 이어지니 추석조차도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 기온이 급변했다. 갑자기 가을날이 찾아온 것이다. 반갑고 기쁜 일이다. 아쉽게도 긴 여름 탓에 아마도 가을은 길지 않을 것 같다. 지구 온난화로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길어졌다. 가을날이 그만큼 귀해진 것이리라. 귀한 것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오늘은 아내가 출근하는 길에 동행을 했다. 함께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선선한 날씨가 자전거 타기에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따릉이를 타고 나는 집에 있는 MTB를 탔다. 아내의 직장까지 따라가기로 한 것이다. 자전거를 끌고 밖을 나서니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다. 깊이가 느껴지는 푸른빛의 광활한 하늘이다. 지겨우리만치 맹위를 떨치던 뜨거운 햇살이 이제는 부드러워져 따뜻하게 느껴진다. 바람은 얼마나 시원하고 맛이 있는지 온몸이 노래를 부르는 듯 신이 나고 즐겁다.
아내도 좋은지 싱글벙글이다. 중랑천을 달리다 청계천을 거쳐 사무실인 동대문 구청이 종착지인 여정이다. 한 시간이 못 되는 거리라 느긋하게 간다. 날이 좋아서 달리기 하는 이들이 있다. 젊은이도 보이고 중년도 눈에 띈다. 생기와 활기가 함께 느껴진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런닝이 유행이라는데 좋은 것 같다. 우리 아들도 시간만 나면 뛰어다닌다. 10킬로미터는 가뿐하게 뛴다. 유행도 런닝처럼 건전하고 유익한 것이라면 대환영이다.
하늘도 푸르고 강물도 푸르고 나무도 푸르다. 바람도 푸르다. 그 속을 달리는 나도 푸른 물이 들어 푸른 피가 도는 것 같다. 정갈하게 소지를 마치고 정화해 놓은 듯한 깨끗한 날이다. 빛나는 햇빛이 눈부시다. 어둠을 물리치는 밝음에는 강한 힘이 있다. 빛 속을 달리는 나의 몸과 마음에도 불이 켜진다.
길가에는 장미가 여전하다. 요즘 장미는 계절이 없다. 긴 여름날 더위에 지쳐버린 것일까? 그런데도 고혹적인 향기도 남아있다. 보기에 좋지만 어쩐지 지쳐 보인다. 인생을 계속 달리면서 살 수는 없다. 쉼이 있어야 한다. 장미에게도 휴식이 필요할 텐데 끊임없이 꽃을 피우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제철에 피는 꽃이라야 보는 이들도 부담이 없다. 황화코스모스가 만발했다. 거센 비바람으로 꽃들이 바닥에 깔려있다. 가지가 꺾여도 개의치 않고 꽃을 피워내는 의지가 멋지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지만 원래부터 바닥에 피는 꽃처럼 자연스럽다. 만발한 꽃에 눈이 즐겁다.
가을의 전령 억새와 갈대도 몸을 풀었다. 가을을 빛나게 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은빛 억새의 물결이다. 구태여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된다. 도심 주변의 천변에는 억새가 많이 자란다. 절정의 미모를 뽐내는 억새를 만났다. 햇빛에 빛나는 자태에 눈이 부시다. 온몸으로 가을을 노래하는 프리마돈나의 위세가 당당하다.
경치도 그만이지만 바람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맑고 싱그러운 바람에 온몸을 맡긴다. 최고로 상쾌한 바람이다. 부드러운 바람의 감촉에 전율이 인다. 무덥고 습한 기운으로 고통받았던 지난 모든 순간을 잊게 만든다. 선명한 주위 풍경에 눈도 시원하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만끽한다. 특별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다. 짧은 순간에 주어지는 쾌적한 날들이 우리 곁을 찾아왔다.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부지런해야겠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내 곁에 머물고 있다. 단, 지각하는 이들에게만 자신을 보여준다. 행복이란 항상 깨어 있어야 누릴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