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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석진 Feb 19. 2023

내 사전에 없는 '미리미리'

지각이 습관인 남자의 넋두리

미리미리는 단어는 내 사전에는 없는 이다. 이로 인한 여파는 말로 다하기 힘들다. 잘못 든 습관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특별히 시간과 관련해서 지닌 악습은 찰거머리가 되어 도무지 떨어지질 않는다.


나라고 해서 아무 생각이 없이 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이 생기면 시간 계획이라는 것을 당연히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임박해지기 전 까지는 그야말로 만사가 천하태평이다. 그러다가 시간은 생각보다 너무도 빨리 흐른다. 결국 아뿔싸! 하는 심정이 된다. 안 그러기로 했는데 또! 가슴 쓰린 후회가 몰려온다.


시간이 늦어 크게 덴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처가에 가려고 기차를 타러 갔는데 시간이 다 되어 출발하는 기차를  먼저 뛰어가서 잡고 아내와 아이를 태운 일이 있었다.  더 심했던 경험은 처음으로 가족들과 유럽여행을 떠날 때 일이었다.  두 시간 전에 공항엘 가야 했는데 여유를 부린 데다 공항버스 정보도 틀려서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비행기를 놓칠 지경이 되었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급한 사정을 알렸다. 그 이야기에 택시는 카레이스를 시작했다. 거의 나는 수준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달리다 사고 직전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항에 도착해서 미친 듯이 뛰었다. 비행기 이륙 직전에 세이프를 해서 안내 방송을 통해 가까스로 탑승을 할 수 있었다.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좌석에 앉으니 식은땀이 났다. 다시는 늦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절절히 새기며...

오늘은 대전에서 글쓰기 관련 모임이 있었다. 혼자 가는 길이라 차를 가지고 가야 하나 아님 기차를 타고 갈까 버스를 타고 갈 것인지 하루 전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비나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어 그냥 고속버스로 가기로 했다. 다행히 여유로운 시간대에 좌석이 있었다. 그렇게 맘 편히 예매를 하고 잠이 들었다.


자다가 핸드폰 알람이 울려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보니  엉뚱하게도 대전에서 서울로 오는 버스 탑승 알람이었다. 19시를 선택해야 했는데 7시로 잘못 선택한 것이었다. 갑자기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자는 아내가 깰까 봐 침실을 나와 거실에서 다시 확인을 했다. 너무 어이가 없었고 기가 찼다. 차편을 취소하고 다시 예약을 했다. 늘 똑똑한 척은 다하면서 구멍은 또 어찌 이리 많은지 나 자신이 한심했다. 어차피 깬 김에 읽고 있던  총, 균, 쇠를 펼쳤다. 독서 모임을 하고 있던 터라 오늘 분량을 읽기 위해서였다. 버스 탑승 한 시간 전에는 나서려고 마음을 먹었다. 책을 읽고 나서 바로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카페에 글을 쓴다고 미적댄 게 화근이었다.


씻지도 않았는데 남은 시간이 겨우 한 시간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져 서둘러 씻고 짐을 챙겨서 뛰어나오니 남은 시간은 겨우 40분 남짓이었다. 전철을 타서는 도저히 차를 탈 수가 없었다. 택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떡해야 할지 갑자기 아득했다. 기차를 타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정신을 퍼뜩 차리고 예약한 버스표를 먼저 취소했다. 다음 차편은 두 시간 후에 있었다. 모임 시간에 무조건 늦을 상황이었댜  일단 그 시간이라도 예매를 했고 빈 석이 생기면 타고 갈 마음을 먹었다.


막상 그렇게 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취소표가 생기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운 좋게도 좌석이 났다. 그렇게 또 늦지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지각하면 큰 코를 다쳐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번번이 위기를 넘는다. 아찔하면서 아슬하게 자꾸 위기를 헤쳐나간다. 그래서 아예 이런 상황에 면역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조차 든다. 그보다 더한 일은 안 좋은 상황이 초래되면  마음이 어렵고 힘들어야 할 텐데 너무도 빨리 마음을 고쳐먹는다.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며 그 상황을 쉽게 잊어버린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며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하지만 지난 실수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반복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 분명하다. 반성과 배움이 빠진 긍정과 낙관은 무책임하다. 이제는 미리미리라는 단어를 마음 판에 새겨 좌우명처럼 달고 살며 다시는 늦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짐한다.

#에세이 #지각 #미리미리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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