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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강산 Apr 19. 2018

 김숨 <뿌리 이야기>비평 (문학)

표정이라는 이름의 문자


     

  2000년대 한국 문단에서는 유령의 담론처럼 떠돌던 문학의 위기가 선언되자, 이에 대한 반격으로 2000년대 문학의 특성을 그 이전과 구별 지어 답을 찾고자 했다. 그렇게 내세운 2000년대 소설을 지탱하는 커다란 축은 ‘새로움’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세기 후반부터 시각적 메시지의 빠른 증가로 ‘독서 사회’를 추방하는 ‘화상 사회’의 지배적 위치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문학의 위기 담론, 문자의 위기 타이틀은 익숙하다. 바야흐로 ‘탈문자 시대’ 사회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한국 문단에서 구축할 ‘새로움’은 무엇일까. 작자는 한국 문단 속 그 ‘새로움’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김숨의 「뿌리이야기」를 파고들어 볼 생각이다.

     

  복숭아나무 뿌리가 그리는 표정을 보라니까.

  저 표정을 좀. 뿌리가 사방으로 뻗치고 엉기면서 그리는 형상이 마치 인간의 얼굴이 짓는 표정 같지 않아? 땅속에 파묻혀 있을 때는 저 표정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을 거야. 흙이 켜켜로 쌓여 잉어 비늘만 한 빛 한 점 떠 돌지 않는 땅속에 파묻혀 있을 때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야.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가장풍부하고 절묘한 표정을 짓는 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나무뿌리가 아닐까.

  저 복숭아나무 뿌리가 땅속에서 수분을 빨아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지었을 표정을 상상해봐, 줄기와 가지들이 휘청 흔들릴 때 지었을 표정을, 진분홍 꽃이 다투듯 피어날 때 뿌리가 지었을 표정을. 원뿌리가 새로 곁뿌리를 칠 때마다, 곁뿌리에서 실뿌리가 한 가닥 한 가닥 돋을 때마다 미묘하게 달라졌을 뿌리의 표정을 상상해봐.

     

  위 내용은 「뿌리이야기」 작품 속에서 화자도 아닌, 화자 연인의 입을 통해서 독자가 듣게 되는 말이다. 화자가 자신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세상에, 작가가 만들어낸 문자들의 조합에 흠뻑 빠져있던 독자는, 난데없이 화자도 아닌 놈이 나타나서 던진 과제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 페이지를 쉽게 넘길 수 없게 된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저토록 힘을 담아서 말하는데 어떻게 그러겠는가. 표정을 보라고. 저기 저 앞에는 나무뿌리가 하나 있으니까 그 표정을 좀 보라고, 소설 속 인물이 말한다.

  이제, 여기서 독자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소설 속 그의 요구대로 성실하게 뿌리의 표정을 “보는” 행위를 실행하는 것과, 그냥 무시하고 페이지를 넘겨버리는 것. (사실 둘 중 어느 것을 택해도 이 소설이 끝날 무렵에 ‘음 좋은 소설이군.’이라는 결론에 닿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영상매체의 경우 이 과제수행은 훨씬 수월하다. 보는 사람은 계속 보고 있으면 된다. 강렬한 색체를 띄고 있는 복숭아나무 뿌리가 스크린에 띄워질 것이고 우리는 그걸 보면 되는 것이다. 반면 소설 속에서 “보라”함은 결국 “상상하라”와 같다. ‘뿌리의 표정이라는 문자’를 온전히 읽어내기 위해서는 눈 뜨고 보는 것보다 차라리 눈감고 상상하는 편이 빠르다. 그렇게 해야만 소설 속 인물이 저토록 힘주어 말하면서까지 전하고 싶은 게 독자의 눈앞에 보인다. 고통 받고 있는 복숭아나무의 뿌리가 그제서야 우리 눈앞에 덩그러니 놓이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의문 한, 두 개가 생긴다. 정말 나무뿌리 표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그래서 ‘뿌리 이야기’인 것인지. 이 의문들을 마음속에 가지고 독자는 다시 슬며시 눈을 뜬다. 다시 문자를 읽어나간다. 그러고 나면 작가가 배치해 둔 인간의 표정이 보이게 된다. 소설 속 인물은 인간보다 나무뿌리의 표정이 풍부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 나무 표정을 보라고 했던 것인데, 정작 그러고 나면 보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표정이다.

     

  자 이제 처음 계획했던 한국 문단의 ‘새로움’에 대한 탐구를 문자매체와 관련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앞에서 이야기 했던 ‘표정’들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그 탐구를 이어나갈 수 있을 듯하다.

  소설 「뿌리이야기」를 한국 문학의 ‘새로움’이라는 틀에 넣고 보면 사실 제목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나무뿌리’라는 오브제 자체에 대한 문제인데, 이 오브제는 그 자체로써 너무나 오래되고, 진부해서 상상력을 자극하기 어렵다. 흥미로운 점은 「뿌리이야기」 소설 속에서 화자가 바로 그 점을 지적한다는 것인데, 독자의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이 부분이 참 재밌다. 이 소설 또한 결국, 핍박받은 인간들의 삶, 그러니까 삶이 뿌리째 뽑힌 사람들과 나무뿌리의 연관관계에 주목하는데, 이는 소설 속 화자가 지적하는 바와 동일하게도 너무나 오래되고 전혀 ‘새롭지’ 못한 시선이다. 말하자면 이 주제는 진부해, 라고 말하면서 그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 소설을 쓴 셈인데, 이는 결국 그 ‘진부함’ 속에서도 빛날 수 있는 ‘새로움’에 대한 자신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뿌리이야기」 속 그 ‘새로움’은 이미 앞에서 다루었던 ‘표정’에서 발생한다.

  「뿌리이야기」는 뿌리 뽑힌 삶들에 대해서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그 삶들 이후에 남겨져 있는 나무가 있고, 나무에 대한 감상이 있고, 나무의 표정과 냄새에 주목한다. 이 과정에서조차 작가는 섣부르게 묘사하지 않고 기다린다. 단지 읽는 이에게 “보라”라고 한마디 툭 던지며, “상상하라”라고 말하며, ‘뿌리이야기’에 앞서서 존재했을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마음속에서 천천히 수집해보라고 넌지시, 그리고 꽤나 단호하게 말한다. 이런 작가의 목소리에서 ‘넌지시’를 먼저 읽는다면 좋은 소설을 읽게 되는 것이고, ‘단호함’을 먼저 읽으면 좋은데 새롭기까지 한 소설을 읽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너지는 한국 문단을 일으킬 ‘새로움’에 대한 발견이 독자 마음 안에 들어있다고 믿는 작품이 아닐까. 묘사되지도 않은, 소설 속에서 나타나지도 않은 사람들이 겪었을 아픔까지 마음속으로 끌어 모으는 힘이, 독자 안에 이미 들어있다고 확신하는 소설이 아닐까. 다만 작가는 그 끝으로 가기 위한 원동력을 조용히 제공하고 있다. 자신이 조립한 ‘표정이라는 이름의 문자’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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