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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강산 Apr 19. 2018

기형도 단편소설 「영하의 바람」과 「겨울의 끝」(문학)

80년대의 안개


  0. 시인의 소설    



  기형도 시에 대한 연구는 그의 시적 세계관을 ‘죽음’과 관련 지으려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이는 요절한 시인이라는 사실 자체와도 관련이 있겠지만, 그의 시에 함의된 ‘죽음’의 이미지가 매우 강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기형도의 시 「안개」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면 시 속에 등장하는 여공이나, 취객으로 대표되는 사회로부터 ‘격리’된 인물들은 결국 모두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 죽음으로 그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 시의 배경을 가득 채우는 ‘안개’의 이미지는 ‘소외’라는 비극적 세계의 특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를 두고 기형도 시를 비판하는 측은 80년대의 사회 현실을 방목하고 구체적 사건이 없는 모호함의 이미지(안개)로 단순히 시대를 풍경처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반면, 기형도 시의 사회 반영성을 긍정하는 견해도 있다. 당시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 계층 간의 경제적 격차, 통제와 탄압 등 80년대에 나타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개인적 체험과 정서를 통해 죽음과 소외의 의미를 형상화 했다고 보는 것이다.

  상충 되어 보이는 양측의 평가는 기형도의 시가 ‘사회 비판성’과 ‘모호성’이라는 양가성을 지니고 있다는 반증인데, 결국 두 견해 모두 80년대라는 시대상을 기형도가 시에서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이다.

  위에 나타난 양가성 즉, 기형도의 시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시대적 특성을 중점으로 기형도의 세계가 그의 단편소설「영하의 바람」과 「겨울의 끝」에서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영하의 바람」-격리  


  단편소설「영하의 바람」에는 아버지의 중풍으로 인해 ‘나’가 어린 나이에 체험한 고아원 생활과 가난의 쓰라림이 담겨있다.

  “아버지는 식물인간처럼 방에만 누워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반신불수로 우리에게 돌아온 아버지의 입은, 쓰러지던 첫날, 얼굴 왼쪽으로 거의 30도 삐뚤어져 있었던 것이 어느 정도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백치 같은 반쪽 웃음을 흘리던 아버지. 아아 그것은 어린 내 가슴에 뜨거운 불비처럼 퍼붓는 절망, 그것이었다.”

  화자 ‘나’ 집안의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가 중풍을 맞자마자,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어머니가 있기는 하지만 삼 남매를 홀로 키우기 힘들다고 판단한 어머니는 둘째와, 셋째(화자)를 고아원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큰 누나는 “그나마 우리 집에 영양을 공급해야 할 연약한 뿌리였기에” 집에 남아 공부하기로 한다. 소설은 화자와 둘째 누나가 고아원으로 가는 버스에서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고아원의 생활, 집으로 복귀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고아원에서 ‘나’는 고아원 사내아이들과 지내게 된다. 처음 ‘나’는 고아원생들이 자신에게 ‘신입 신고’를 시키며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싸여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아이들은 “무표정한 얼굴, 무관심한 얼굴이 태반이”고, “우리같이 새로 들어온 아이들을 보는 경우는 아주 흔한 일”이기에 ‘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나는 그 무관심 속에 놓여 “무표정하고 지리한 눈길들이 나를 쏘아” 보는 것을 느끼는데 이 눈길들을 두고 화자는 “열두 살 또래의 묘한 반항심이, 격리된 세계 특유의 기질과 합치되어 암팡진 눈빛을 번득이고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이 ‘격리된 세계’에서 사는 고아들은 새롭게 나타난 ‘나’에 대한 반응을 보일 기력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 아이들의 무기력함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소설의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신체의 허약함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게 되는데, 바로 그 추측이 발생하는 시점에 화자는 “아이들은 탄탄한 힘살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아이는 가슴이 툭 튀어나와 있기도” 하다는 걸 발견한다. 화자는 그 후에 초조하게 벽에 기대어 누군가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지만 그 누구도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

  화자가 무기력의 원인을 찾게 되는 것은 결국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이다. 화자는 이제는 바로 자기 자신이 그 ‘고아원 사내아이’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나는 이제는 오히려 편안한 감정을 가질 수 있었다. 유대감, 좋은 단어, 서로 말은 없었지만 우리는 우리를 느꼈다.”

  화자는 고아원 아이들의 무리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지만, 이 고아원이 ‘격리된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후의 화자(회상하고 있는 미래의 화자)와 독자는 암울한 시대상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 암울한 기운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이어져 묘한 애잔함을 만들어낸다.

  소설의 끝에 ‘나’는 결국 고아원으로 자신을 데리러 온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만 같이 있던 둘째누나는 고아원에 남기로 한다. 가족 넷이서는 살기 힘들 테니 자신이 남겠다고 둘째 누나가 직접 말한다. 이에 대해 ‘나’는 “현희 누나는 힘이 세었으며, 웬만한 동갑내기 사내애들과도 싸위 이길 수 있었던 누나였기 때문에”라고 말하며 누나의 말에 동의한다. 그렇게 어머니와 단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는 영하의 바람을 느끼게 된다.

  “그때였다.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얼음가루 뿌리듯, 차창을 부루 듯이 비집고 들어와, 내 온몸을 싸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아아... 신작로는 다시 맹렬한 기운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똑같은 풍경들이 바람처럼 휙휙 스쳐갔다. 잘 있어, 잘 있어, 나는 중얼거리며 꿈꾸듯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는 고아원에 누나를 남겨두고 ‘누나는 괜찮아.’라고 말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고아원이라는 조그만 ‘격리된 세계’를 벗어나며 “잘있어”라 말하는 아이가 탄 버스의 종착점은 80년대의 거대한 ‘격리된 세계’이다. 화자 또한 무기력한 고아원 아이들을 통해 그 사실을 간접적으로 느꼈기에, 그 싸늘한 기운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3. 「겨울의 끝」-안개    


  「겨울의 끝」은 삶에서 바닥모르고 끝없이 발생하고, 이어지는 고통을 응시하는 윤국이라는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다. 윤국은 아침에 일어나 “한강변에서 한 사내 동사. 나이 스물 넷. 사인은 얼어붙기 전에 먹은 치사량의 극약”이라는 신문기사를 본다. 이에 “골빈 놈이 여기도 있었군.”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윤국이 ‘자살’에 대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의 죽은 형 때문인데, 윤국의 형은 교통사고로 사실상 반죽음 상태에 놓여 있다가 가끔씩 정신을 차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죽여줘. 죽여줘. 내 육체적 고통보다 내 자신과의 외로움이 더 무서워. 어머니 아버지 모두 나의 식물 같은 살아있음만으로도 그들의 윤리 의식을 충족시키고 있는 거야. 그들도 남이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그는 “윤국아, 살고 싶어. 이렇게...영원히 누워 있더라도..아..아..내 육체가 숨 쉬고 있을 뿐이라도 그것뿐이라도... 사람은 그 자체로도 존엄한 거야...”하고 윤국에게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 일로 인해서 윤국은 자살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윤국에게 승후라는 인물이 다가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승후는 처음 본 윤국에게 “자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묻는데 윤국은 자신의 형을 떠올리며 “아직도 이따위 감상주의자가 있었군.”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살에 대한 토론을 벌이다 승후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준다.

  승후의 아버지는 히로시마 원폭 당시에 일본에 있었는데, 그는 20대를 넘기는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은 백혈병의 씨앗이 심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여섯 명의 아이를 낳는다. 승후는 이를 “희생의 씨앗”이라 말하며 “시집간 큰누나가 내가 고2때 죽었고 그 다음해 큰형이 스물 넷, 작은누나가 스물둘의 나이로 죽었어. 식구들이 하나씩 죽어갈 때마다 아버지는 이사를 해야 했어. 소문이 무서웠던 거지. 우리 남은 형제들은 스스로 그 죽음의 비밀을 터득하게 되었지...작년에, 무지무지한 고통 끝에 막내가 열일곱으로 죽고 말았어.” 하고 밝힌다.

  이후 승후에게서 “들어오는 즉시 나오라”는 전화를 받고 윤국은 승후를 찾아 한강교로 간다. 그곳에서 승후는 “엊저녁 석간을 읽어봤어?... 바로 이곳이야. 여기서 형이 자살했어.”라고 말한다. 마지막 남은 형제가 자살을 선택한 장소에서 승후는 윤국을 부른 것이다.

  바로 이 한강교라는 배경을 둘러싼 이미지는 온통 안개이다. 윤국은 이 안개 속에서 “인간에게는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무엇이 있어.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의 끝까지 의연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보다 아름다운 행위는 없다고 생각해. 아무리 커다란 절망으로 파국이 온다 해도 사랑의 순간 그 시간의 아름다움은 끝까지 소멸되지 않아.”라고 말하며 승후를 설득해보지만, 승후는 자신의 말을 마치고 그저 조용히 비척비척 안개 길을 걷는다.

  ‘묵직한 안개처럼 윤국이 말했을 때 윤국은 순간, 승후의 얼굴에서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자기 형의 얼굴을 보았다. 승후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걸음 못가서 승후는 가로등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주르르 미끄러지며 주저앉았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윤국은 그때 보았다. 캄캄한 심연의 도시 여기저기에 안개 속에서 빛나는 거울 조각을. 윤국은 급히 안개가 가득 찬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다.’

  소설 속 ‘안개’는 승후의 고백이후부터 단순하게 자연 현상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시대상 위에서 살아온 인물들의 서사를 쭉 따라온 독자는 한강교에서 발생하는 안개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바라보기 위해 애쓰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강’이라는 공간에 서 있는 승후와 윤국의 삶에 ‘안개’가 관련되어 있음을 파악한다. 이렇게 ‘안개’의 의미가 변환되면서 독자는 소설 밖으로 튀어 나와 현실 직시의 영역에서 이 소설을 이해하게 된다. 독자는 1980년의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이 소설에 대응하게 된다. ‘안개’의 의미를 ‘격리’된 세계, ‘안개’ 속에 갇혀버린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이렇듯 기형도의 시와 마찬가지로 기형도의 소설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예감이 보인다. 독자는 그 예감 속에서, 기형도의 글 도처에서, 어느 저녁의 축축하고 불길한 80년대의 안개를 만날 수 있다.      


참고-----

장준영, 李賀와 기형도, 그 죽음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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