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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Mar 07. 2022

잠에 빠지는 이유

2013.3. 계간<니> 30호 '우리는 왜 재미있게 살지 못할까?'

나는 언제부터인가 잠을 잘 때가 제일 행복했다. 지금 상황에 짓눌려서 꾸게 되는 쫓기는 꿈 혹은 무서운 꿈을 꿀 때 말고는 다른 어떤 것을 하는 것보다 잠자는 게 가장 좋다. 고등학교 때는 “나중에 많이 잘 수도 있는 잠 제발 지금은 좀 줄이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항상 들었다. 내가 대학을 가고 싶었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내 마음대로 잠 좀 잘 수 있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엄마는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기에 잠만 퍼 자는 나에게 허송세월 한다며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했다. 



지금의 나는 그때 그렇게 잠을 많이 잔 것을 후회하긴 한다. 그 당시 잠은 공부 압박을 피하기 위한 도피였다고 생각한다. 공부 아니고도 재미있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은데 그것들을 놓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난 남들 다 보는 만화도 안 보고 라디오도 안 들었었다. 공부하기 싫을 때 도망치는 책도 고전이라고들 하는 문고판 책들이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작가의 소설들. 그것만 봐도 내가 아는 세상은 얼마나 재미없고 좁았나 싶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바로가 아니고 훨씬 시간이 지나서야 밤에 듣는 라디오 맛을 알게 됐다. 만화책이 어른들이 말하던 것처럼 읽으면 시간 낭비가 아니란 것도 말이다. 그렇게 밤새는 재미를 알고부터는 밤에 점점 늦게 자고 아침에는 점점 늦게 일어나게 됐다. 잠도 예전보다는 줄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하고 몇 년간 백수로 있으면서 잠자고 싶은데 못 잔 경우는 없었다.  


잠이 눈에 띄게 많아진 건 세훈이를 낳고 집에서 있고 나서부터였다. 모유 수유하면서 아이 보는 일 말고는 크게 할 일이 없기도 했고 그렇게 아이 보는 것이 고되기도 해서 될 수 있으면 많이 잤다. 산후조리 기간이라며 그렇게 많이 자는 나를 합리화했었다. 그런데 자도 자도 피곤했다. 밤에도 2~3시간도 안 돼 깨는 아이와 같이 깨니 낮에도 아이가 잠자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날들을 보내다 아이가 밤에 푹 자는 기적 같은 때가 왔다. 나도 8시간 숙면을 취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막상 그런 때가 되니 그동안 못했던 것들이 생각나 이것저것 하다 보면 밤시간은 금방 갔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아침에 일어나는 건 점점 더 힘들어졌다. 아이는 잘 자고 일어나 쌩쌩한데 나는 일어난 아이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아이가 두 돌쯤 되자 나도 거의 예전 기력을 회복한 거 같았고 알트루사도 알게 돼 숨통이 트여 난 살 만해졌다. 


그런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점점 심해지는 패턴이 있다. 주기적으로 잠이 많아지는 때가 있다. 한 주 정도 부지런히 밖에 나가고 이것저것 하고 세훈이한테도 잘한다. 그러다가 어느 때를 기준으로 씻을 힘도 없고 씻기도 싫고 나가기는커녕 계속 잠만 자고 싶다. 나가기가 싫어 세훈이 어린이집 안 데려다준 경우도 꽤 있다. 그리고선 아이 끼니랑 간식 챙겨주기가 버거울 때 어린이집에 데려갔어야 했다고 후회를 한다. 그러면서도 풀어질 대로 풀어진 몸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확 정신이 들고 밥도 해서 먹고 청소를 한다. 세훈이한테는 미안했다고 사과를 하고.


그렇게 며칠을 늘어져 있던 나는 또 바빠진다. 잠으로 날려버린 시간들을 보충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 한 번 나갔을 때 최대한 많은 것을 하려고 한다. 뿌듯한 날도 있지만 쫓기는 듯한 하루를 보내고 이러다 조만간 또 처지지 싶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알찬 하루를 보냈다 싶은 날은 ‘내가 예전부터 이렇게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지난날이 후회도 된다. 


아니다. 나에게도 하루 종일 깨어있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 때. 수업시간에 졸아본 적도 없고 수업시간에 들었던 게 시험 때까지 기억이 났었다. 그래서 시험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시험은 잘 볼 수 있던 때였다. 1, 2학년 모두 같은 담임선생님이었는데 다 좋은데 긴장과 이완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알 수 없는 말을 성적표엔가 적어주셨다. 그걸 본 부모님도 별말 없으셨고 난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나 선생님께 여쭤보지는 못했다. 난 내가 긴장하며 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지금에야 기억난다. 미술 선생님이 사진반 선생님이기도 했는데 우리들의 눈 부위를 찍어 작품을 만드셨다. 사람들, 우리 같은 학생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눈을 모아놓은 작품이었다. 작품집에 실린 사진을 보았는데 선생님들은 다들 내 눈을 알아봤다. 내가 선생님들을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봤다고 한다. 난 수업시간마다 얼어붙은 듯 시선을 그분들에 고정시키고 있었던 거다. 그게 긴장이었나 보다. 쉬는 시간에도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없던 나는 주로 자리에 앉아서 책을 봤던 것 같다. 그러다 집에 가면 스르르 풀어져 있었던 것 같다. 


지난 학기 내가 다니고 있는 방송대 상담실에서 상담을 받았다. 거기서도 한동안 너무 잠만 자고 싶은 때를 얘기했다. 선생님은 누구나 자기가 살기 위해 최선의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니 어느 누구도 비난받을 수 없다 했다. 내가 자는 행동이 정말 최선일까 의심스럽긴 했지만 죄책감만 심해지면 좋을 리 없을 것 같아 ‘배터리 충전 중’이라 이름 붙이고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태로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분 배터리가 있는 전화기와는 달리 그런 게 없는 나는 방전될 때까지 에너지를 써버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충전에 며칠씩 걸리고 그로 인한 여파가 크니 말이다. 내 조절능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에너지 효율이 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만족감을 모르는 나는 그만하고 쉬어야 할 때를 모르고 내 기준이 아니라 남의 기준에 여전히 신경 쓰는 나는 쓸데없이 긴장하고 쉬 피로해진다. 아,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게 에너지원이 부족하다는 거다. 사는 재미, 삶의 희망, 나에 대한 믿음.


그래도 내게는 희망이 있다. 정신이 확 깨어나는 때가 있고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주는 가족이 있다. 감사한 일이다.      


정은선_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니이다. 교육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재능과 흥미를 살려 일하고 싶어 한다. 남편과 다섯 살 난 아들 세훈이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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