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른이 될까?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입시와 고등학교 생활도 또 어느새 흐르며 끝이 나고 있었다. 선연이에게서 대학 합격을 알리는 문자가 온 그 날 나는 눈 내리는 다리 위를 걷던 중이었다. 별 같은 눈이 내리는 밤을 헤치며 걷던 도중에 핸드폰은 주머니 속에서 조약돌처럼 반짝거리며 반가운 진동을 토해냈다. 잠겨있는 화면 위로 ‘선연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라는 문구가 보였고, 우울했던 내 마음에는 잠시 미소가 피어났다. 잠시 이 여운을 간직할까 머뭇거리다가 후다닥 핸드폰을 열어서 문자를 확인했다.
-나 대학 합격했어! 고마워!
나는 답장을 하지 못하고 조금은 서글프고 조금은 기쁜 미소를 띤 채 다리 위에서 차들이 바쁘게 오고 가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간 그토록 애타게 선연이를 걱정했던 것이 조금은 의미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선연이에게 조금 힘이 되어주기는 했던 걸까. 내 걱정이 세상을 조금 바꾸기는 했을까. 아마 아닐 가능성이 더 높긴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때'라는 생각이 곧 그 뒤를 뒤따랐다. 결국 모든 것이 잘 풀린 셈이었다. 아파하고 힘들어하면서도 선연이는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한 일일지도 모른다.
잠시 짓쳐들어오는 기쁨과 슬픔을 더듬으며 나는 세상을 마음에 담았다. 내리는 눈은 침묵이자 흐름이었고 차도 위의 명멸하는 불빛들은 소란스러운 멈춤이었다. 흐르는 것은 세상, 멈춰있는 불빛은 나였다. 아직 채 좋은 사람이 되어보지도 못했는데 사람들은 꿈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내가 멈춰있건 말건 사람들은 여지없이 흘러갔다. 그 느낌은 약간은 슬픔이었고 약간은 기쁨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명멸하는 세상을 바라보다가 나는 선연이에게 답장을 써 내려갔다.
-축하해! 나한테 고마울 게 뭐가 있어. 원하던 곳에 간 거지?
-음... 내가 원하던 곳인지는 잘 모르겠어. 잘 가기는 했는데, 부모님이 좋아하시지 뭐.
-잘할 거야. 고생한 보람이 있네! 이제야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이야. 행복해질 거야. 너도, 나도.
-응! 곧 보자!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목도리를 조금 더 따뜻하게 둘러매었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에선 왠지 손잡았을 때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다. 어깨 위로 12월의 눈이 소복하게 쌓여갔다. 선연이에겐 대학생활이, 내게는 긴 재수생활의 시작이 그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연이와는 달리 나는 입시에 실패했었다. 선연이에게 문자가 온 그 날 오후에 대학에서도 문자가 왔었다. 그것은 마지막 대학에서 보내준 불합격 통보였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때의 방황은 많은 것들을 가져갔었다. 주어진 시간 동안에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에 현재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그 좌절 앞에 담담해지려고 했지만 생각만큼 잘되지는 않았다. 자꾸만 성공, 또는 실패는 사랑받는 것과 직결되어있는 것만 같았다. 성공하지 못한 자는 사랑받을 자격도 없다는 자괴감이 자꾸만 내 안을 채웠다. 그게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아직 어린 나는 무겁게 짓눌러오는 삶의 부담감을 쉽게 이겨내지 못했다.
선연이가 대학을 갔다는 사실은 그런 와중에 참 기쁜 소식이었다. 입가에 나 자신에 대한 흐릿한 자조로 슬픈 미소가 걸리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 기쁨은 곧 힘들고 아팠음에도 잘 견디며 나아가 준 사랑하는 친구에 대한 고마움으로 번져갔다. 몇 해 전 공항에서 만났을 때도 나보다 많이 성숙한 모습으로 삶의 방향이 되어주었던 그 친구는 지금도 나보다 한걸음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차마 부담이 될까 봐 그 아이에게 그렇게 말해주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그 아이를 동경하며 가는 길을 뒤따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아마도 부럽지 않고 고마웠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은정이는 참 신기하게도 선연이와 같은 대학교에 진학했었다. 과가 다르기 때문에 둘이 마주칠 일은 별로 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참 아끼고 소중한 두 소녀가 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한다는 사실은 왠지 모를 기쁨을 건넸다. 아마도 세상 속에서 버티는 게 힘에 부칠 때면 찾아갈 곳이 한 군데는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선연이도 은정이도 내게는 참 소중했다. 둘의 소중함은 약간 다른 종류의 소중함이긴 했지만 그래도 빼놓고 삶을 설명할 수 없는 종류라는 점에선 같았다.
은정이는 졸업식 날에 내게 우유갑을 주었다. 졸업식 날 우유갑을 받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기뻐하기보단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뭔데. 먹다 남은 건 아니지?”
“편지야!”
우유갑 안에는 편지가 빽빽하게 쓰여 있었다. 왜 이런 데다가 편지를 썼냐고 물어보려다가 왠지 진심을 비판하는 느낌을 줄 것 같아서 잠자코 있었다. 사실 어디에 쓰였는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빽빽하게 진심이 담긴 편지였고 그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고마웠다. 다만 이제 다시는 같은 교실에서 장난치며 웃고 떠돌며 서로 핀잔조차도 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조금 아쉬운 마음에 툴툴거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우유갑 편지에는 친해질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수없이 많은 사람 중에서도 더없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어서 고맙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더불어 앞으로 힘들 재수생활에 대한 격려와 여자 친구를 사귀는 비법 같은 것들이 예쁜 글씨로 담겨있었다. 은정이는 담담하고 진지한 어조로 적어놓았었다.
-찰스, 정말로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꼭 앞뒤 가리지 않고 덮치도록 해. 기회는 한 번뿐이야. 정말로 놓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일단 들이대도록. 그렇게 해서 넘어오지 않을 여자는 없다! 파이팅! 내년에는 대학도 가고 여자 친구도 사귀는 거야!
그 방법이 여자 친구를 만들어줄지, 아니면 이제 성년이 되었으니 교도소에 보내줄지 약간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참 은정이 다운 편지였다. 덕분에 읽으며 왠지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이제 어른이었다. 더 이상 학생이라는 변명으로 비겁하게 도망칠 수 없는 그런 시기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실에 왠지 마음이 아팠다.
나는 은정이에게는 졸업 선물로 책을 주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아름다운 일러스트로 채운 동화책이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간략하게 적었다. 친구가 되고자 어린 왕자가 손 내밀어야 했던 것처럼 나도 친구가 되고자 손 내밀 수 있어서 기뻤다고. 그 동화책의 사막여우처럼 너는 참 매력적인 사람이며, 동시에 어린 왕자처럼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순수함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이다. 책을 받으며 은정이는 내겐 항상 소중했던 그 환한 웃음을 오래도록 지어주었다.
성희는 졸업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성희는 나와 마찬가지로 재수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성희의 기분이 어떨지는 어렴풋하게 알았지만 또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담긴 아픔은 더듬을 수는 있지만 어떤 시간과 경험 속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는 없었다. 괜스레 걱정되어 가져온 편지를 감추고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전화기가 꺼져있었을 뿐이다.
재수를 하면서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사람들과 얽히는 것보다는 조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특별히 연락을 끊으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외로울 때마다 연락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은정이와 형동이는 각자 대학생활을 시작하느라 바빴고 성희는 나처럼 입시 준비를 하느라 말도 없었고 연락도 없었다.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연락했던 것은 선연이뿐이었다. 연락이 그렇게까지 잦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때보다는 조금 자주 답장이 오고 갔다. 삶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며 선연이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다.
그 무렵에 선연이는 남자 친구가 생겨있었다. 남자 친구도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함께 다닌 초등학교를 나오고 나와는 중학교까지도 같이 다녔던 해송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였다. 거의 9년을 같은 학교를 다녔으면서도 나로선 그렇게 좋아할 수 없던 남자아이이기도 했다.
해송이라는 그 남자아이와는 중학교 3학년 때에 같은 반을 했었다. 당시 해송이가 공부를 잘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체격도 그렇게 다부진 친구는 아니었다. 다만 해송이는 여자아이들과 참 친하게 지낼 줄 알았다. 여러 여자아이들이 해송이를 오빠처럼, 때로는 보살펴주고 싶은 동생처럼 아끼고 신뢰했다. 여자아이들과 죽이 잘 맞는 아이였기에 해송이는 반에서 나름대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것은 결국 그 아이를 반장이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해송이는 여자아이들에게는 지나치게 잘해주는 반면 남자아이들에게는 이기적이고 까다로운 아이였다. 해송이의 이기적인 면은 여자아이들을 챙겨주어야 할 때면 특히 더 도드라졌다. 반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해 해송이는 자기와 친한 여자아이들이 있으면 꼭 모금을 해서라도 생일을 학급 전체로 챙겨주었다. 돈이 없다고 해도 강제로 받아내고 따로 불러내서 짜증 내는 그 모습에 많은 남자아이들이 불만을 가졌다. 친한 아이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제외하곤 다른 행사들은 뒷전이었다. 남자아이들의 생일은 가끔씩 까먹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여자아이들에게 완벽하게 진심인 것도 아니었다. 해송이는 여자아이들의 친밀감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런 모습 때문에 나는 늘 해송이와 거리를 두었다. 나 말고도 많은 남자아이들이 비슷한 이유로 해송이를 싫어했기에, 그리고 여자아이들은 필연적으로 진심이 아닌 남자아이와 친구 관계로 남지 못하고 떠나가기 때문에 해송이는 아마도 참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선연이가 그런 아이를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지만은 않았다. 사실 초반에는 질투도 좀 했을 것이다. 그건 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렸고, 선연이에 대한 감정은 어린 마음으로는 쉽사리 형언할 수 없는 특별함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질투와 불안을 누른 계기는 선연이에 대한 신뢰였다. 나는 선연이가 만든 선택이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어떤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선연이가 자기 자신의 손으로 가장 행복한 삶을 빚어나가는 것에 조금의 간섭도 하지 않고 싶었던 것이다. 가만히 선연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힘든 일이 있는 대로 기쁜 일이 있으면 기쁜 일이 있는 대로 그렇게 그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처음에는 선연이도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선연이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닭살스러운 문구들과 사진들은 마치 퍼즐 조각처럼 해송이의 홈페이지에 올라와있는 무언가와 연결되었다. 가끔씩은 참 느낌 있는 사진이나 글도 올라왔다. 지금 돌아보면 참 유치하고 채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한 내용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글이나 사진들이 신기해 보였을 뿐이다. 당시의 우리들의 삶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 있어서 한 치 앞 미래도 내다보지 못했다. 가끔씩 그 아이들이 주고받는 글 속에서는 그 안갯속을 헤쳐 나가려는 노력들이 느껴졌기에 조금 먹먹하게 질투가 날 때조차도 그 행복을 응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복이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두 달이 지나자 가끔씩 밤늦게 전화가 걸려왔다. 해송이와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던 선연이의 전화였다. 선연이는 해송이가 잘해주기는 하지만 집착이 심하다고 그랬다. 어디를 가더라도, 친구를 만날 때도, 심지어는 밤에 자느라 문자 답장을 못해도 속상해하고 화를 낸다고 말이다. 선연이는 아직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받아줄 자신이 없다고 그랬다. 화를 낼 때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게 되지만 이제는 자신이 정말로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잘 모르겠다고, 그래서 너무 힘들다고 말이다. 해송이는 외로운 아이였다. 짐작한 대로 해송이는 중학교 때 이후로 친구가 별로 없었다. 아마도 선연이에게 고백을 한 것은 해송이에게 있어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백은 성공했다. 해송이는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 달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달은 밤하늘을 온통 자기만의 빛으로 잡아먹고 있었다.
선연이는 자신의 친한 친구들을 해송이에게 소개해주는 실수를 저질렀었다. 주변에 친구가 하나도 없는 해송이가 외로워 보여서 자신이 아끼는 보물 같은 친구들을 나누어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연이로서는 참 진심 어린 감정이자 선의로 행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연이는 외로움과 집착은 단지 좋은 사람들을 붙여준다고 해서 가셔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해송이는 중학교 때 같은 반 여자아이들에게 그랬듯 선연이의 친구들을 독점해버렸다. 선연이의 친구들은 어느새 해송이의 친구가 되어있었다. 친구들이 선연이보다도 해송이를 불쌍하게 여겼기 때문에 선연이는 힘들 때조차도 이야기할 사람 하나 없었다. 해송이의 그런 면들은 중학교 때 늘 보았던 것들이었다. 여자아이들은 항상 해송이를 불쌍하게 여겼다. 여리하고 상처가 많은 듯한 분위기는 해송이가 늘 두르고 다니던 위장이었다. 여자아이들의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그 가여움은 그렇게까지 진솔한 감정들은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순간순간에 사람들을 휘두르기엔 충분한 감정이었다. 선연이는 그렇게 친구들을 잃고 자신의 세상에서 소외되어버리며 외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선연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지만 다독이거나 같이 화내 주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선연이가 말을 거는 수화기 건너의 암흑이 공백이 아닐 수 있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닿으려고 애를 쓸수록 사람은 멀어진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대로 흐르면서도 내가 그저 이야기 건너편에 있어줄 수 있기만을 희망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우유부단했기 때문에 우리는 일일호프에서의 사건들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4월 초에 선연이네 학교에서 했던 일일호프 이벤트에서는 참 다채로운 감정들이 오고 갔다. 세상에 일일호프 이벤트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선연이에게서 처음 들었었다. 새 학기가 되면 학과에서 큰 술집을 빌려서 하루 동안 직접 술도 팔고 안주도 요리해서 파는 그 행사는 많은 사람이 와야지 적자가 나지 않는 특이한 종류의 행사였기 때문에 누구라도 초대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기어코 초대를 받은 것이 무언가 특별한 것이라고 착각하며 발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처음엔 혼자 가보려고 했지만 막상 출발하려고 보니 뭔가 어색했다. 그런 행사에 혼자 가면 과연 어색하지 않을지 자신이 조금 없어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형동이에게 반쯤 협박하는 연락을 보내보자, 형동이는 남의 학교 일일호프에 뭐 하러 가냐고 툴툴거리면서도 그 자리에 나 혼자 보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일호프에 끌고 가는 대가로 형동이가 바란 것은 취할 수 있을 정도의 술이었다. 형동이는 오랫동안 사귀어온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며칠 되지 않았었다. 형동이는 여자 친구를 잠시 잊을 수 있을 정도의 술을 원했고 나는 그것을 공급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양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술도 사람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술로 사랑을 잊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만큼 천진난만했던 순간들이었다.
일일호프를 하는 신촌 거리에 도착해보니 거리는 참 시끌벅적 난리였다. 새로 입학한 학생들의 싱그러운 에너지와 함성이 거리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세계에서 술집 밀집도가 가장 높다는 신촌 거리는 아마도 젊음의 열기 역시 가장 뜨거운 곳일 것이다. 곳곳에서 그동안 알았던 친구들과 그들이 새로 사귄 여자 친구들을 마주쳤다. 새로 대학생이 된 아이들은 강의실보다는 신촌 거리를, 그리고 공부보다는 사랑과 데이트를 택했다. 초저녁인데도 벌써 얼큰하게 취해있는 친구들도 많았다. 덕분에 나 역시 잠시 재수의 우울함을 잊고 들뜬 채 즐거워할 수 있었다.
선연이네 일일호프 앞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는 키가 멀대같이 큰 대학생이 술에 떡이 되어 실려 나오고 있었다. 그 남자아이를 부축하는 건 안쓰러운 표정의 자그마한 여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은 거의 반쯤 혼이 나간 듯한 모습으로 자기 키 두 배는 될듯한 남자아이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호프 안에서 정글에서나 들릴 법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칫 정신을 놓으면 잡아먹힐 것만 같은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잠시 겁을 집어먹고 계단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자 뒤에서 형동이가 떠밀었다.
“들어가 인마. 왔으면 온 목적을 달성해야지.”
“좀 무서워 보이는데. 난 취해본 적 없는걸.”
“지랄한다. 내가 오늘 너 제대로 취하게 해 줄 거야. 이따위 잡스런 곳에 끌고 올 거면 각오를 했어야지.”
약간은 초조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계단을 내가자 ‘어서 오십쇼!’ 하는 큰 고함소리와 함께 맥주와 흥분과 유리잔 부딪히는 건배 소리와 유쾌한 난장판과 소란스러운 애정이 가득 담겨서 찰랑거리는 거대한 홀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신촌의 느낌, 대학생의 느낌인가 싶어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구석에 형동이와 함께 자리를 잡았다. 거대한 메뉴판이 테이블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큰 크기에도 불구하고 메뉴판에는 소주가 없었다. 대문짝만 하게 소주병이 그려져 있기는 했지만, 검은색 마커가 그 위로 찍찍 그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며 형동이는 지나가던 웨이터를 불러 세웠다. 웨이터의 블라우스에는 노란색 명찰로 ‘[08학번 공주]’라고 적혀있었다. 형동이의 시선이 잠시 그 명찰에 가서 멈추었다. 형동이는 대번에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을 지었고 긴 생머리가 잘 어울리지만 영 공주는 아니었던 그 웨이터는 부끄러워하며 명찰을 들고 있던 쟁반으로 가렸다.
“어떤 게 필요하세요?”
“여기 소주 없어요 공주님?”
“네. 죄송해요. 아까 초저녁에 다 떨어졌어요.”
“세상에. 맙소사. 이런.”
우리는 달콤하고 비싼 KGB 맥주를 몇 병 시켰다. 형동이는 여자애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술이라고 툴툴대면서도 몇 병이고 계속 마셨다.
“아까 그 남자애는 그럼 맥주 마시고 취해서 실려 간 거야?”
“그렇지 뭐.”
“맥주 마신다고 실려 갈 수 있을까?”
“될 걸. 해볼래?”
형동이는 정말로 실험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는지 그 달콤하면서도 알코올은 거의 들어있지도 않은 술을 연달아서 5병을 시켜댔다. 형동이가 술을 음미하고 있는 동안에 선연이가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벌써 꽤 취해있는지 몽롱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슴에는 [08학번 페릿]이라는 노란 명찰이 붙어 있었다.
“페릿? 족제비?”
“응! 선배들이 지어줬어!”
“안 닮았는데.”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흰 담비라면 모를까.”
“그것도 그렇게 닮지는 않았어!”
선연이가 무엇을 닮았는지는 차차 생각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선연이는 술기운에 어지러운지 살짝 기대어왔다.
“취했어?”
“아아니. 아주 조금? 힘들어.”
“해송이는?”
“안 온대.”
“왜?”
“아까 잠깐 왔는데 내가 바빠서 제대로 가지도 못했거든. 친구들하고 같이 나가버렸어. 전화도 안 받아.”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선연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선연이는 그렇게 잠시 기대어서 쉬다가 다시 또 서빙을 하러 시끄러운 호프 속으로 사라져 갔다. 본래의 계획은 초저녁에 잠깐 들렸다가 해송이와 마주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었는데 왠지 선연이가 위태로워 보였다. 자리를 지키며 조금 더 머물러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 위에는 술병이 하나둘씩 쌓였다. KGB병이 그렇게 많이 쌓여있는 모습은 여태껏 세상 그 어느 곳의 술집에서도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우리는 작정이라도 한 듯 그 술만을 마셔댔다. 그 달콤한 향 사이에 녹아있는 아릿한 아픔이 손바닥을 눌러왔다. 칼로 긋는 듯한 그 선명한 감촉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사랑한다는 증명이었다. 살아있기에 아프고 사랑하기에 아팠다. 그렇게 천 번을 아파해야 어른이 될까. 우리는 이야기로 삶의 상처를 채웠다.
선연이는 와서 몇 번이고 머무르다가 갔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술을 계속 먹어야 하는 건지 술기운이 점점 오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만큼 자리에 와서 기대어서 쉬다가 가는 시간도 점점 길어져 갔다. 몇 번은 기대어서 꾸벅꾸벅 졸아서 안타까운 마음에 무릎베개를 해주었다. 형동이는 그 모습을 보고 전화를 한다는 핑계로 밖으로 사라지더니 1시간 뒤에야 돌아왔다. 형동이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숙취라도 풀라며 나와 선연이에게 아이스크림 바를 건네어 주었다. 그 사려 깊은 모습은 짙은 감동으로 남았다.
밤이 깊어지자 호프의 분위기도 점차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삶에 지치고 술에 취해버린 몸을 이끌고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서로에게 의지하여 호프 바깥의 세상으로 사라져 갔다. 굳어진 삶의 멍에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선연이는 무릎을 베고 잠든 채로 일어나지 않았다. 온몸을 긴장한 채 굳어져 잠든 그 모습에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호프 안의 오래된 스피커에서는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랑했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친군 줄만 알았어
아무 향기 없이
언제나 영원하길.
또다시 사랑이라
부르지는 않아
아무 아픔 없이
너만은 행복하길.
널 만나면,
말없이 있어도
또 하나의 나처럼
편안했던 거야
널 만나면,
순수한 네 모습에
철없는 아이처럼
웃었던 거야
내겐 너무 소중한 너. 내게 너무, 소중한, 너.
해송이는 새벽 2시가 넘어서 일일호프가 마무리될 때까지 전화 한 번을 하지 않았다. 선연이 핸드폰을 빌려 전화를 걸어보아도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매정한 메시지만 되풀이되어서 들려올 뿐이었다. 선연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 단순한 동작이 어깨 위에서 깊은 외로움과 슬픔의 선이 되어 얽혔다. 그 선은 아지랑이처럼 마음을 어지럽혔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수는 있었지만 마음을 쓰다듬어줄 수는 없었다.
나와 형동이는 4시까지 남아있었고 결국엔 뒷정리까지 도와주는 희한한 신세가 되었다. 형동이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은 처음이라며, 남의 일일호프에 왜 뒷정리까지 도와주냐고 이러다가 뒤풀이에도 끼겠다고 투덜거렸다. 선연이는 비틀거리다가 과자 그릇을 바닥에 엎어놓았다. 소파에 졸고 있으라고 선연이를 기대어놓고 형동이와 함께 과자 조각들로 퍼즐을 이루는 바닥을 치우며 웃었다. 형동이는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내심 다 이해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로 뒤풀이까지 남았다. 청소를 마무리하고 가려던 나와 형동이를 선연이네 선배가 이렇게 가면 미안하다며 붙잡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 학과 사람들과 남은 술과 과자를 가지고 웃고 떠들며 자리에 남았다. 그 소소한 뒤풀이 자리에서 선연이는 자신의 친구를 한 명 소개해주었다. 웃는 게 참 착해 보이는 홍은이라는 아이였다. 선연이는 그 친구를 같은 과 동기이자 가장 아끼는 친구라고 소개해주었다. 술기운에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우리 보고 좋은 친구가 되라며 소개해주는 선연이의 모습에 모두들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나와 홍은이는 어색하게 인사하며 전화번호를 주고받았고 형동이는 별 희한한 꼴을 다 본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선연이가 과자 접시를 몇 개 더 바닥에 쏟은 뒤에야 뒤풀이는 끝이 났다.
선연이는 홍은이와 함께 집으로 갔고, 나는 그들이 택시를 무사히 타는 그 모습까지 본 뒤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던 형동이는 한마디를 했다.
“좋아하는구나.”
“그런 거 아냐. 쟨 남자 친구 있는걸.”
“그게 뭐가 중요해. 좋아하네 뭘.”
“글쎄. 참 좋은 아이이기는 하지.”
“야 씨 아까 기대서 잠들었을 때 어쩔 줄 몰라서 미치는 줄 알았어. 난 그 자리에서 어쩌라고.”
“전화하러 나가서 잘 놀고 오더만 왜.”
“일부러 전화하러 나간 척한 거거든? 잘 될 거지?”
“응. 잘 될게. 이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야지.”
“그거 말고. 아냐 됐다. 취했냐?”
“아니. KGB로는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 우리는 저 일일호프의 VIP야. 두 명이서 18병 먹었어. 거지야 이제.”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자. 돈 아깝다. 야 씨 포장마차나 갈래?”
“그럴까.”
조금 더 아픈 이야기들을 대화로 풀어보기 위해 밤이 끝날 때까지 형동이와 함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기울였다. 형동이는 이제는 떠나간 여자 친구를 그리며 말없이 눈물로 찬 술잔을 기울였고 나는 참 못 미더운 자신과, 참 사랑하고 아끼는데도 어떤 힘도 되어줄 수가 없는 친구를 생각하며 애잔함의 잔을 기울였다. 달빛이 우리를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술잔에 비치는 달을 보며 해송이와 그 아이의 집착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해송이는 잠시 시간을 내서 자신을 특별하게 대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밤새 침묵으로 선연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사랑받고 싶다는 그 집착은 참 많은 것들을 망쳐놓고 있었다.
나는 차갑게 식어가는 어묵탕을 보며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준다는 것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해송이도 아마 자기 딴에는 선연이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항상 집에 데려다주고, 기념일이면 이것저것 특별한 선물을 하는 그 모습에는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돌려받으려고 했기에 해송이는 아마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선연이에 대해서 그렇게 불안해하고 아파하며 괴로운 관계를 빚어나갔던 것일 테고 말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사랑했다고 한들 무언가 달랐을까? 내 정성과 내 진심과 해송이의 모습과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기는 할까. 갑자기 공항에서 현진이가 해줬던 말이 귓가로 가만히 다가와 깨달음이 되었다.
“계속 좋아하면, 너도 아플 거고 아플 거고 선연이도 크게 상처 받을 거야. 너네 둘은 사람을 좋아하고 아끼는 방식이 참 달라. 너는 정성을 다하겠지. 그 정성은 선연이에게는 조금 다르게 비추어질 거야. 똑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도 않을 테고 말야. 나는 그렇게 좋아하며 좋은 관계를 망쳐놓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어. 나는 네가 잘못된 선택으로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길 바라.”
현진이의 우려는 시간을 초월한 채로 이제야 내게 닿았다. 어쩌면 내가 진심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그저 집착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받고자 하는 어린아이 같은 기대가 포함되어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인관계를 겪어보지 못한 나라면 아마도 많이 상처 받았을 것이다. 문자에 답장이 오지 않아도, 잠시 연락이 되지 않거나, 다른 곳에 있어도, 나는 아마 흔들리며 아파했을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며 그 사람의 흔들리는 손 그림자마저도 마음에 담았기 때문에, 그렇게 온 세상의 의미가 그 사람 하나였기에, 그 사랑은 이루어진 대도 아픔이었을 것이다. 풋사랑은 그렇다. 어쩌면 모든 첫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우리가 그렇듯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일호프가 끝난 뒤에도 나는 가끔씩 선연이가 해송이 때문에 아파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선연이는 그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자주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참 많이 아파했다. 아무래도 남자 친구와의 문제를 털어놓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들어준다고 해서 해결을 해줄 수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다고 해서 가벼운 아픔 일리 역시 없었다. 가끔씩 만났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라는 선연이의 상처는 생생하게 전해졌다. 한번 죽을 만큼 아파본 사람은 언제고 또 그만큼 아파할 수 있다. 마음의 상처라는 것은 딱지가 앉아서 단단해 보이더라도 완전히 아물기까지는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것이다. 충분히 단단해지지 못했는데 또 다른 무언가가 그 속살을 찔러 들어온다면 쉽사리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선연이가 예전만큼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라며 참 많은 노력을 했다. 그 노력이 사실 그렇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매일 새로이 실감하는 나날들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은 내 한계를 여실히 저미어 놓고 있었다.
선연이와 만날 때 가끔씩 홍은이도 같이 보았는지라 우리는 어느덧 셋이서 친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처음 서로를 알아가는 시점에서 홍은이는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던졌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홍은이의 질문에 나는 선연이의 말을 빌어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홍은이는 그 말을 곰곰이 곱씹더니 이미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날 일일호프에서 선연이를 챙겨주는 모습만 보아도 누군가를 참 많이 아끼는 게 느껴졌다고 말이다. 그 말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아낀다 하여 마음을 챙겨줄 수는 없음을 여실히 느끼던 요즘이었기에 나는 조금은 쓸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9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