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방을 소음으로 채울 요량으로 아무렇게나 틀어놓은 넷플릭스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데이트를 하는 상황인 것 같은데 오가는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어딘가 좀 어색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하던 일을 멈추고 내용에 집중을 해 본다. 그렇게 보게 된 러브 온 더 스펙트럼(Love on the spectrum)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이들의 연애 이야기다.
자폐증에 대해 고정관념이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과 확연히 구분되는 행동을 하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독립된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예전에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경중증의 장애인들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이 정상이라는 것도 틀린 개념이라는 것은 조금 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정상이라는 말속에는 비정상이라는 뜻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으니까. 다양한 인간군상에서 정상을 정의 내리는 것은 빨주노초파남보 여러 색깔 중에 어떤 색깔이 정답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단지 일상생활을 하는 데 얼마만큼 지장이 있느냐 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에피소드에 나오는 인물들 역시 제목에 포함된 스펙트럼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각양각색이었다. 내가 가졌던 고정관념처럼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 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 증세가 미미해서 굳이 본인이 밝히지 않는다면 알아차리기 힘든 사람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자폐증상을 성격으로 알고 살다가 성인이 되어 진단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러브 온 더 스펙트럼을 보면서 인간이 가진 문제는 있음과 없음으로 가를 수 없다는 것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그렇다면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있다'라고 말을 하려면 과연 어떤 기준이 필요한 것일까? 이 질문을 품고 보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가끔 펼쳐진다. 예를 들어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인물이 건넨 말에 주변 사람들이 박장대소한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내게는 합리적으로 들리는 그 말이 어째서 농담 취급을 당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일상생활에서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어왔다. 진지하게 한 말이 가볍게 받아들여진다거나, 혹은 반대로 농담으로 건넨 말이 상황에 찬물을 끼얹은 결과로 돌아오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 어떤 말을 하는 게 적절한지 늘 헷갈렸다. 때문에 말을 하기 전에는 늘 두세 번씩 자체검열을 하다 보니 쉽게 피로해져서 대화하는 상황 자체를 기피하게 되었다. 의사소통에 문제를 느끼다 보니 사회생활에도 지장이 가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는 있었지만 사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니 소심한 성격 탓으로 돌릴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재미로 해본 곰돌이 푸 정신병리 테스트에서 자폐 점수가 높게 나왔던 기억이 났다. 불안과 우울, 강박은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던 부분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용어도 생소한 자폐 점수가 높아서 의아했다. 그때는 그냥 재미로 봤던 것이기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넘어갔지만 이번엔 뭔가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구글에서 '성인 자폐 검사'를 검색하고 제일 상단에 있는 결과 페이지로 가서 간단한 테스트를 했다. 29점이 나왔다. 만점이 50점이지 싶었는데 결과 페이지를 찬찬히 읽어보니 성인 여자의 평균은 15점이란다.
이 점수는 다소 평균에서 벗어난 결과이며 경우에 따라 당신은 사회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기에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우울은 감기처럼 익숙하지만 자폐라는 단어는 생소하기도 하고, 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고정관념 때문에 감기 수준이 아니라 대형병원을 방문해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는 어떤 큰 병의 전조같이 들렸다. 혹시나 대충 답변을 해서 잘못된 결과가 나온 건 아닐까 싶어서 조금 더 신중하게 테스트를 해보았는데 두 번째 결과는 첫 번째보다 높은 32점이 나왔다.
두 번째 테스트로 확인사살을 당하고 나서야 살아오며 겪었던 수많은 어려움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특히 상황판단을 잘하지 못해서 오는 불편함이 컸다. 마주하는 상대가 두 명 이상을 넘어가면 오고 가는 대화를 좇고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대화는 정답이 없다는 점에서 나의 말과 행동이 의도치 않게 타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항상 불안했다. 평소에는 잘 티가 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누적돼서 상태가 안 좋을 때는 동문서답을 하거나 말을 더듬어서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 이러니 스스로 대인기피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 만나기를 꺼렸다. 하긴, 아주 어려서부터도 집에 초인종 소리만 나면 숨어 들어가기 바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회사에서 전화받는 것이 무서워서 받지 않고 미루다가 결국 안 좋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지금은 여러 면에서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가능하면 타인과 교류는 피하고자 하는 본능은 아직도 여전하다.
내가 한 온라인 테스트는 어디까지나 간이 테스트이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한 검사를 받고 싶어서 관련 기관을 찾아봤지만, 곧 성인을 대상으로 한 전문적인 자폐 검사는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폐증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발달되어 있고 성인 자폐증의 경우는 성격적인 부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고 한다. 실제로 성인 100명 중 1명은 자폐증상이 있지만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한다.
다행히 자폐라는 키워드로 검색하고 알아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무지로 인해 증가했던 불안이 점차 줄어들었다. 결과지에 나온 대로 아마 나는 32점보다 높은 점수를 얻은 정상적인 성인 2%에 해당될 것이다.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벼운 테스트라 어떤 판단도 임의로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본 테스트에서 내 점수가 통계상 끄트머리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껏 나 스스로도 조금은 이상한 성격이라고, 모난 사람인 탓이라고 자책하며 넘어간 일들이 자폐증(과 가까운 성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그것이 성격이든, 성향이든, 뇌신경의 문제이든 간에 상관없이 내가 표준 무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나 다울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작성일: 2020. 08.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