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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오시 Dec 18. 2023

느낌표

* 이 글에는 드라마 Doctor Foster와 부부의 세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최근 드라마 부부의 세계 원작인 Doctor Foster를 봤다.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된 것도 재미있었지만 원작 또한 훌륭했다. 오랜만에 드라마에 온전히 몰입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에 두세 편의 에피소드를 보며 단시간에 완주했다.



원작에서는 리메이크된 부부의 세계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디테일이 있었다. Doctor Foster에서는 아빠 역할인 Simon의 자살 시도가 꽤 길고 느린 호흡으로 그려진다. 이태오의 자살시도는 바로 다음 아들의 탈주로 이어지기 때문에 깊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Simon은 도로로 뛰어들기를 포기하고 가족과 마지막 식사를 한 후 다음으로 약물 자살을 시도한다. 때문에 극 중 인물들에 집중을 할 시간이 충분했다. Simon에게 약물과 주사기를 전달해 준 Gemma에 빙의가 된 나는, 정말 Simon이 죽기를 바라는 걸까? 자살이 잘못에 대한 속죄가 될까? 그가 죽으면 내 속도 좀 후련해질까? Simon은 정말 반성을 해서 죽으려고 하는 걸까? 자신의 행동이 정말 잘못이라고 생각하긴 하는 걸까? 아니, 그의 행동이 그렇게까지 잘못된 건가? 하는 이런저런 생각에 깊게 빠졌다.


사랑에 빠져 서로에게 충실할 것을 약속하고 결혼을 한 두 남녀와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 시간은 흐르고 남자는 다른 여자와 또다시 사랑에 빠지고 섹스를 하고 또 자식을 낳는다. Gemma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거짓임을 깨달은 그 순간 느끼는 절망의 깊이는 어느 정도 일까. Simon 또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로 모든 것을 잃은 후 자식한테서도 모욕을 당하고 자살시도까지 한다. 무엇보다 그 둘의 최대 피해자인 어린 Tom. 이 모든 게 하이퍼리얼리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비극이 주는 재미에 푹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Simon이 죽으려고 할 때 그가 정말 없어지기를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죽으면 이렇게 재미있는 드라마가 허무하게 끝나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가 괴로워할 때는 인과응보라는 생각에 참 잘 되었다 싶다가도 슬픔에 울부짖을 때엔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Gemma가 괴로워할 때면 그 괴로움에 동화되어서 과연 이 행복한 가족의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꼬이게 것인지 고민하다 결국 심히 불편해졌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모든 순간에 그저 모니터 너머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때론 달콤하고 고소한 팝콘과 함께. 그리고 한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다음 회차가 궁금해서 중간에 끊지 못하고 연달아 여러 에피소드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나는 이 드라마를 몹시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들의 비극이 내 것이 아니었기에.




2014년에 허술한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었었다. 다큐멘터리의 주제는 내가 언제나 고민하고 있는 ‘자살’이었다. ‘살고 싶지 않은데도 왜 죽지 않는(못하는) 것일까’가 나의 큰 질문, 즉 내가 언제나 가지고 있는 물음표였다. 명랑 컴퍼니에서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를 한 것인데,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참여를 했던 건 아니었지만 결과물로 뭔가 만들어야 한다고 하니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고민을 풀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또한 이 프로젝트를 빌미로 평소에 물어보기 어려운 타인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https://youtu.be/mYXzynuQVQ4


지금 보면 너무나 허술하고 부족하지만 당시에는 이 결과물이 꽤 재밌다고 생각했다. 과정 또한 재미있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끝나도록 ‘왜 사는지'에 대한 나의 질문에 명쾌한 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정답이랄 것이 없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으려 했던 나의 미숙함 탓이었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한 친구의 대답은 꽤 인상 깊었다. 그녀도 과거엔 나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했었지만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흘러 ‘왜 사는지’나 ‘왜 죽지 않는지’ 같은 왜(Why)라는 질문이 이제는 자연스레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즉 어떻게(How)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고.


그래서 이 후로는 나도 진심으로 그녀처럼, 나이를 먹으면 나의 질문도 '어떻게'로 시작되길 기대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일 땐 Why가 How로 바뀐 것 같은 때도 있긴 했다. 하지만 다시 또 괴로운 순간이 오면 언제나 나는 Why라는 질문으로 회귀했다. 그런데 최근 Doctor Foster를 보며 깨달은 것과 지금껏 생각해 오던 것 들을 한 데 합쳐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물음표에 대한 나만의 느낌표를 가져보려 한다.


사실 나는 그 모든 괴로운 순간을 즐기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ref: https://unsplash.com/photos/cWzGo1JNvZs


즐거워 낄낄거리는 데서 오는 재미가 아닌 괴로움에서 오는 재미. 과거의 내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할 것이 분명하지만, 이제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모든 순간을 그저 즐기고 있을 뿐임을 알게 되었다. 너무도 깊은 곳에 있는 이 변태적 감정을 발견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과거의 모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있는 이유이고, 또 닥쳐올 미래의 괴로움에서도 살아있을 이유가 될 것이다.


지난주,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어떤 말 뒤에 ‘그래도 나는 내가 너무 좋아’라고 말을 덧붙였다. 이 문장이 머리에만 들어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말로 내뱉고 나니 어색한 느낌이 들어 새삼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내가 좋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심지어 내가 싫을 때조차도 그런 내가 좋았다. 그래서 이런 말을 내뱉은 것에 놀라진 않았지만 다시 생각을 해보니 정확히는 내가 나라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을 느끼게 해주는 내가 좋은 것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생각조차 못했을 것 같은 모든 종류의 다양한 생각과 감정들, 그것이 생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의 괴로움일지라도.


이 글이 언젠가 또 다른 순간 괴로움에 괴로워하는 내게, 타인의 비극을 관람하는 모니터 너머의 존재처럼 그렇게 나를 바라보면 그 순간 역시 그저 팝콘 한 봉지 거리의 즐길거리에 불과할 뿐임을 상기시켜 주길 바란다.



(작성일: 2020.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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