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31일
연휴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이렇게까지 후회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냥 단순히 누나를 오래 못 보면 괴로울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가장 괴로운 건 내 욕심이었다.
"말 놓는 건 안 돼."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단호한 말투. 흔들림 없는 카톡. 누나는 그저 원래의 선을 지키려 했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생각보다 깊이 박혔다. 감정이라는 건 원래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계속 맴돌며, 그 감정이 어떤 종류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렵게 만든다. 섭섭한 건지, 서운한 건지, 아니면 혼자만의 오해였던 건지.
그리고 그 와중에도 무리수를 뒀다. 같이 놀자고,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처음부터 말을 놓아도 되냐고 물어서는 안 됐다. 그런 말도, 그런 행동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걱정이 된다. 혹시 누나가 드렸던 워치를 돌려주면서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면 어쩌지? 모든 걸 정리하고, 나를 선 밖으로 밀어내 버리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누나가 다시 한번 아량을 베풀어 주길 바라는 것뿐이다.
누나는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훨씬 배려심이 깊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 배려에 기대고만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합리화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결국 그 ‘이 정도’라는 기준은 계속 변해왔다. 누나와 용인에 갔을 때만 해도 충분히 감사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만족이 쌓였고, 더 많은 걸 원하게 됐다. 그리고 그 욕심이 결국 선을 넘는 행동들로 이어졌다.
욕심은 무섭다.
사람을 점점 더 멀리 가게 만들고,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만든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이 어떤 대상을 향해 움직이는 원동력은 결국 욕심이니까. 문제는, 그 욕심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나는 누나에게 너무 많은 걸 바랐을까. 누나가 나를 알아주길 원했고, 내 감정을 이해해 주길 바랐다. 그런데 문제는 누나가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공과사를 잘 구분했다. 누나가 그걸 알아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한 모순적인 감정. 나는 이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시도할 것이다.
말을 놓고 싶다. 그건 단순한 언어의 변화가 아니다. 그건 관계의 변화다. 그리고 나는 누나와의 관계가 변화하길 원한다.
누나는 여전히 단호하게 거절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여전히 다시 시도할 것이다. 그것이 실패하더라도, 나는 다시 한번 누나에게 다가갈 것이다.
세상에는 단번에 이뤄지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 나는 후회하면서도, 동시에 다시 시도할 준비를 하고 있다. 공과사를 구분하는 내 모습을 누나가 알아주든 말든, 나는 나대로 움직일 것이다.
그것이 덕질의 본질이다. 그리고 나는, 덕질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