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누나의 계절을 지나며

2025년 5월 16일

by 양동생

나름 쓸쓸하고 따뜻한 날이었다. 잔잔하다고 하기엔 어딘가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심한 듯 다정한, 다정한 듯 냉담한 감촉. 오늘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상처 하나 없는 마음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냐고. 결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꼭 ‘그런 건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안다. 제대로 된 대답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우린 모두 자기 안의 생을 하나씩 들고 살아갈 뿐이다. 어떤 건 부드럽고 어떤 건 뾰족하고, 그건 봄날의 공기처럼 명확하지 않다.


누나를 마음에 품은 채 지나간 계절을 떠올려 본다. 조금은 미숙했고, 조금은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던 봄. 나는 그 계절을 잘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그 봄을 지난 덕에 여름을 만날 수 있었다. 같은 여름의 빛을, 같은 방향에서 함께 받아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누나와 같은 계절을 지나친다는 건, 때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의 여백을 만든다. 누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같은 시절을 묵묵히 옆에서 지나가고 싶은 사람. 나는 말없이 일하는 누나의 옆모습을 자주 바라보곤 했다.


누나가 선택한 길에 늘 긍정이 피어나길 바란다. 마음속 어디에선가 환하게 번지는 빛이 되길. 다시 언젠가, 아주 사소한 불씨라도 비출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누나가 흐리지 않고 살았으면 한다. 흐린 마음이란 건 결국 자신을 놓아버린 상태니까. 비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저 스며들게 두었으면 좋겠다. 비는 지나가고 나면 마음을 맑게 하니까.


나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쓸쓸해질 뿐이다. 진심이 어설프게 감춰질 때, 관계의 표면은 곧잘 부서진다. 누나는 알까. 누나의 몸과 존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품고 다니는지를.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숨기고, 그것을 짊어진 채 걸어간다. 그게 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난 날부터 나는 계속해서 방황해 왔다.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감정들, 이름 붙일 수 없는 결핍들, 그리고 막연한 기대 같은 것들이 나를 이끌어왔다. 언젠가, 내 마음이 닿기를. 언젠가, 내 말들이 전달되기를. 오늘도 나는 그렇게 조용히 누나를 향해 묻는다. 그리고 누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또 다른 계절로 나를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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