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마흔 여섯번째 글 - 죽음의 계승

죽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by 이준

매일 글을 쓸 시간이 될 때마다 느끼는 감정입니다만,

생각보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의 다양성은 의외로 적고, 하루의 시간동안 얻는 새로운 앎을 얻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느낍니다.


오늘은 '철학' 관련의 서적을 읽다, 이런 문구를 발견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주제인데요.

대학생은 아니지만, <대학생이 알아야 할 리얼철학> 이라는 책을 통해 얻는 문장을 공유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막스 셸러는 인간을 죽음으로의 방향을 제험하고 있는 존재로서 이해했다. 따라서 사람은 죽음을 직면하지 않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상태에 머무르면, '어차피 죽을거라면'하고 그때의 욕구 충족에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 반대로 죽음을 인생의 완성으로 이해하게 되면, 신체가 상실된 후에도 지속되는 인간성이란 가치의 실현을 목표로 일상 생활을 조율하게 된다.


살아 있는 동안은 인격이 몸의 상태를 '뛰어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곧 인격은 다시 그 몸의 붕괴를 뛰어넘는다. (...) 여기서는 인격이 자기 자신의 계속되는 영생을 체험한다. - 막스 셸러, <죽음과 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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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죽음이 임박한 조부모가 자녀와 손자와 함께 한 가정에서 생활하면서, 서서히 쇠약해져갈 때, 가족은 조부모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단순히 목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손을 맞잡거나 조금이라도 대화하고 미소를 나누는 경험을 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바뀐다.


고통을 견디며 자신을 둘러싼 가족에게 애정과 감사를 표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은 그 자신의 인품과 인생을 집약해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조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가족에게 사랑과 존경으로 보살핌을 받는 행복한 죽음을 맞고 싶다는 희망이 내면에 생겼을 때, 그들의 인생은 그러한 죽음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삶으로 변하게 된다.


바람직한 죽음의 발견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을 것이다. 이는 유족에게 사생관의 새로운 정립이며, 조부모가 자녀와 손자, 손녀에게 계승하는 인생관이기도 하다.

- 제 7장, 고독한 우리의 메멘토 모리, <대학생이 알아야 할 리얼철학> -



가장 싫어하는 말이 '그냥 죽을까?'와 같은 말입니다.

그 다음 싫어하는 말이 '어차피 죽을 것'과 같은 말이고요.


왜 싫어하는 지를 돌이켜보면,

정말 죽음의 문턱 앞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기에,

죽음의 무게와 생존의 열망을 기억하고 있어,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해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이가 '어차피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하며 이야기 할 때,

때로는 '한번 죽지, 두번 죽냐'와 같은 관점에서 행동하는 모습의 이질감을 설명할 순 없었어요.


경험으로 얻은 불편함일 뿐,

가끔은 정말 삶의 의미는 무엇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저 또한 쉽게 대답할 순 없었거든요.


오늘의 위 이야기는 삶은 죽음으로서 완성되며. 그 완성은 다음 세대로 계승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어요.

죽음은 결말이자, 다음 세대로 내 이야기, 의지를 전할 수 있는 마지막 시점이라고 할 수 있죠.

결말이 오기전까지 내 이야기가 어떻게 쓰여지냐에 따라 나라는 존재의 영속성 가치가 있을 지 달라지겠죠.

'어차피 죽을 것이라서'가 아닌 내 이야기를 위한 '준비'가 오늘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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