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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문 Apr 24. 2023

내글구려병

브런치를 시작한 후로, 좋은 책, 좋은 글을 읽다 보면 내심 위축된다.

이렇게 좋은 문장이 세상에 많은데, 나는 오늘도 지면낭비를 하는구나 하는 마음 때문이다.

내가 봐도 만족스럽지 않은 내 글을 내보이는 것이 부끄럽고 아쉽다. 그렇게 내 글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들 때면, 더 나아가는 것이 힘들어진다.


웹소설 작가들 사이에선 이런 상태를 일컬어 '내글구려병'이라 칭하기도 한다. 내 글이 한참 부족해 보여서 글을 못쓰는 현상으로, 연재하던 글을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글도 그렇지만, 많은 일들이 일정 수준을 넘어설 때 '내OO구려병'을 앓게 하는 것 같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내 영어 구려병'이 아닐까.

나름대로 외국인에게 길 알려줄 정도의 영어실력은 갖추고 있음에도, 문법이 틀렸을까 봐 입도 못 떼는 상황. 어느 정도의 문장은 독해할 수 있음에도, 일단 영어가 나오면 '아이고 난독증이야!' 하며 파파고를 찾는 상황.


난 '내 영어 구려병'을 오래 앓았다.

실제로 대학교에서도 기초영어반일정도로 문법 수준이 낮아서, 내내 영어는 마음의 짐이었다.

졸업을 위해서는 토익 720점은 넘겨야 했다. 그래서 1학년 때부터 토익학원의 600+반(600점을 넘기자는 목표의 수강반)을 다녔으나, 600점도 쉽게 넘지 못했다.


주변에선 '토익학원 왜 다녀? 너 수능영어 했으니까 그냥 치면 800은 나올걸?' 했으나,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더욱이 내 영어실력을 밝히기가 부끄러워져, 내 영어성적을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않았다.

때로 대화를 나누다가 누군가 갑자기 영단어로 드립을 칠 때면,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비웃고 놀릴까 알아듣는 척 웃기도 했다.ㅠㅠ


그러다 취업준비를 하려니 영어스피킹 성적이 필요하다는 게 아닌가. 아-.

나는 수소문 끝에 강남에서 손꼽히는 1타 강사 OPIC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선생님은 '토익성적이 몇이든 상관없다. 오픽은 자신감이다. IH 밑으로는 받을 생각도 하지 말라'며, 틀려도 괜찮으니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큰 목소리로 유쾌하게 영어를 구사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영어를 잘해 보인다나...(?!)


수강생들은 실제로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오버해 가며, 자신감 있게, 큰 목소리로 2주 동안 수업을 따라갔다.

나는 연습시간에 시제 구사도 자유롭게 하지 못해서 자주 지적받았으나, 실전에선 실력에 가당치 않는 IH를 받았다.


선생님은 인생의 그 어떤 것도 다르지 않다며,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자신감 있게 꿈꾸면서 살라고 하셨다.(아아, 역시 1타 강사님..!)

기대 이상의 영어성적과 함께 '내 영어 구려병'을 완치받은 나는 머지않아 최종면접 합격통지도 받게 된다.


그래, 인생의 그 어떤 것도 다 같지 않을까. 조금 부족해도 씩씩하게 자신감 있게 내가 킹왕짱인 것처럼 흉내 내다보면, 어느 순간 킹왕짱도 되지 않을까.

'내OO구려'하며 가만히 누워있는다고 마법처럼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니까.


지금 당장 달리지 못한다 해서 걸음마를 멈출 순 없는 법. 넘어져가며, 아장아장 우습게라도 걸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기어 다녀야 할 테니까.

마치 내가 우사인볼트라도 된 양 씩씩하게 아장거려본다. 내가 우사인볼트라고 생각하면, 걸음마가 더 즐거워지는 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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