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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Oct 06. 2020

나답게, 너답게

나를 인정하고, 너를 인정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작은 어른들

고등학생 시절, 야간 자율 학습이 지루해질 무렵에 종종 했던 놀이가 하나 있었다. 선생님의 감시를 피해 즐기기 딱 좋으면서도 종이와 펜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그런 놀이, 오목. 이 게임을 시작하기 전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우선, 경건한 마음으로 흰 종이에 오목판을 그린다. 그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셨을 때 언제든 가릴 수 있도록 종이의 윗부분을 살짝 책으로 덮어 둔다.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마크를 정해야 하는데 보통은 동그라미와 까만 동그라미 중 하나를 고르곤 한다. 그날 내 마크는 까만 원이었다. 가위 바위 보에서 지는 바람에 친구가 먼저 정중앙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게임을 시작했다. 


상대가 어디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 중앙에서 시작했기에 일단은 친구가 그리는 방향을 따라 막는 전략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막는 전략을 그만두고 길을 개척하는 전략을 사용했어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에는 친구의 원을 막는 데에만 열중하다가 참패해버렸다. 마구잡이로 막는 것에 열중한 나와 달리 그 속에서 나름 자신만의 길을 만들었던 친구는 나란히 놓여있는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올곧게 그려진 하얀 동그라미 주변에는 이리저리 흩뿌려진 까만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색칠된 그 원들은 상대에게 집중하다 정작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린 내 모습을 대변하는 듯 보였다. 작은 게임일 뿐이지만 그날 일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우리의 삶도 오목 게임과 비슷한 것 같다. 물론, 오목은 상대와의 대결에서 이기기 위한 고정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인생에서는 그 목적을 자신이 정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오목의 두 가지 전략만큼은 우리의 삶과 아주 닮았다. 나만의 길을 가거나, 누군가를 쫓거나. 많은 사람들이 전자를 선택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와 누군가를 비교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사람처럼 되려고 혹은 그 사람보다 더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타인의 모습을 수시로 확인하며 나와 비교한다. 이 광경을 멀리서 보면 목적지 없이 그저 옆 사람을 수시로 확인하며 엎치락뒤치락 달리는 모습처럼 보일 것이다.




작은 어른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그날은 똑같은 일상 중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날인 주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쉴 수 있는 여유로운 그런 날이었다. 그는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열린 창문 밖으로 흔들리는 잎사귀들을 바라보았다. 기분 좋은 바람에 따스한 햇빛까지, 아주 산뜻한 휴일이었다. 그때 고요함을 깨고 어디선가 쫑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어른은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기척도 찾을 수 없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작은 어른 한 사람뿐이었다. 다시 차를 마시는 데 집중하던 작은 어른은 이번엔 명확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저 친구는 정말 좋겠다. 나는 맨날 아프게 깎여야 내 역할을 할 수 있는데... 부러워.”


작은 어른은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소리가 끊기기 전에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주방으로 가고 있었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질수록 숨을 죽이고 조심스레 다가가니, 식탁 위에 대충 놓아둔 연필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지우개가 달린 노란 연필 한 자루가 그곳에서 훌쩍이고 있었다. 작은 어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기... 좀 전에 말한 게 너였니?”


작은 어른의 목소리에 괜히 더 울컥한 연필 한 자루는 한 방울씩 눈물을 떨어뜨리며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 나야. 내 말 좀 들어줄래? 며칠 동안 이곳에서 저기 있는 전자레인지를 지켜봤어. 저 친구는 덩치도 크고, 버튼도 달려 있고 편하게 앉아서 멋있는 일을 하더라. 나는 훨씬 작고 멋있지도 않아. 게다가 힘들게 깎여나가야 사용될 수 있지. 나는 왜 이런 모습일까...”


작은 어른은 당황하여 잠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굳어있었지만, 달래주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필아. 저 친구랑 너는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존재야. 너랑은 생김새도 다르고 쓰임새도 다른 걸. 내게 도움을 주는 역할이라는 건 똑같지만 너희 둘이 주는 도움은 서로 달라. 네가 부족한 게 아니라 그냥 다를 뿐이야. 비교를 하려면 서로 같으면서 어느 한 가지만 달라야지. 너희는 완전히 다른 데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어...!”


노란 연필은 울음을 그치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저 친구에 비해서 할 줄 아는 게 없단 말이야...”


작은 어른은 연필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짓고 그에게 시선을 맞췄다.

“너는 친구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도와주고, 기억해야 할 메모를 적어주잖아. 멋진 시를 써내려 갈 때도, 흥미진진한 소설을 쓸 때도 네가 없으면 안 되는 걸. 네가 가진 능력에 집중해 보는 건 어때? 너 참 멋지거든. 비교하며 경쟁할 필요 없어.”


노란 연필은 잠시 망설이다가 환하게 웃으며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작은 어른은 일을 마친 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전날에 남겨둔 음식을 데워 먹기로 결정한 그는 접시를 든 채 전자레인지로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전자레인지도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연필에게 말을 걸었던 때가 떠올라서 슬며시 대화를 시도했다.

 

“안녕. 지금 울고 있는 거 너 맞지? 혹시 어디가 고장 나서 아픈 거니?”



전자레인지는 모든 불빛을 꺼버린 채 조용히 읊조렸다.

“고장 나지 않았어. 단지 내가 너무 쓸모없어서 슬플 뿐이야... 저기 저 연필을 봐. 저 친구는 멋들어진 시를 쓸 수 있잖아. 근데 나는 냄새나는 음식만 품고 살아야 해. 그것뿐만이 아니야. 네가 버튼을 누를 때마다 나는 전기가 통하는 저 뜨거운 콘센트를 꽉! 잡고 있어야 하는 걸. 나도 연필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싶어. 난 왜 이런 거지 대체?”


작은 어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참 신기하다. 얼마 전에 네가 말한 그 연필이 너를 부러워했거든. 편안하고 멋지게 일하는 네가 부럽다고 하더라. 자기는 매일 깎여나가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해서 싫다고 했어. 그런데 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네? 너랑 그 친구는 역할도 모양도 다른 걸. 너는 너대로, 연필은 연필대로 저마다의 능력이 있어.


전자레인지는 반쯤 열려 있던 문을 쾅 닫으며 의문을 표시했다.

“내가 어떤 능력이 있는데? 나는 저 친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며칠 동안이나 지켜봤다고!”


작은 어른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너는 얼어 있는 음식을 빠르게 녹일 수 있도록 도와주잖아. 빨리 차를 마시고 싶을 때 물을 데워주기도 하고. 나는 네가 우리 집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따뜻함을 주는 존재야 너는. 너의 모습에 더 집중해 보는 건 어떠니?”


"... 정말 내가 그런 존재야?"

작은 어른의 끄덕임에 마음이 풀린 전자레인지는 살며시 웃으며 닫아버린 문을 슬쩍 열어주었다.




그날 밤 꿈나라로 떠나기 전, 작은 어른은 서로를 부러워하며 한탄하던 두 사물을 떠올렸다. 


'우리도 마찬가지구나. 그냥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살아가는 건데...'




우리는 매일 같이 서로를 비교한다.  내 옆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덜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상대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내 능력이 작아지지도 않는다. 누군가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가진 것들이 하찮아지는 일도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치 이 세상에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듯 행동하고 있다. 저 사람이 행복하면 나는 덜 행복해지는 것처럼, 저 사람이 뛰어나면 내가 초라해지는 것처럼, 저 사람이 돈이 많으면 나는 가진 게 없는 것처럼 여긴다. 그렇게 자신이 가진 것보다 타인의 것에 더 집중한다.


타인에게 집중하게 되면 그때부터 레이스가 시작된다. 삶이라는 길 위에서 홀로 걸어가다가도 옆 사람이 지나가면 일단 뒤처지고 싶지 않아 따라서 뛰게 된다.  레이스에서는 내가 어떤 속도로 가고 있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가  이상 중요치 않아진다. 어떤 사람은 그 과정에서 빠른 상대방을 바라보며 압도되어 한참 동안 주저앉아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일단 따라가기도 한다. 


우리가 걷는 길은 저마다 다르다. 삶은 한 곳에서 우르르 뛰며 서로를 비교하게 만드는 경쟁이 아니라, 각자의 길 위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저마다의 코스와 방법으로 걸어가는 산책이다. 모양도 길이도 색깔도 다른 그 길 위에서 나는 나대로, 지나가는 너는 너대로 가면 된다. 걸어가다가 건너편에서 누군가를 마주쳤을 때는 반갑게 손 흔들어 주면 된다. 굳이 나와 비교하며 아파할 필요가 없다.

   

비교하는 마음이 들 때, 작은 어른의 깨달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살아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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