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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Oct 12. 2020

부족해도 괜찮아

반쪽짜리,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단어

우리는 넓은 세상에 나갈수록 우리가 가진 능력이 기대만큼 대단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특히 이 말에 더 공감했다. 인형과 조곤조곤 말을 잘하던 나는, 내가 어디서나 당당하게 발표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초등학교로 진학한 내 모습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능수능란하게 발표하는 친구들은 널리고 널렸을 정도로 많았고 그에 비해 나는 정말 소심했다.


초등학생 시절, 반에서 홀로 과학 시험 100점을 맞았을 때 나는, 내가 과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니 그 시험에서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과학 공식을 쉽게 푸는 것은 물론이고 과학 공모전에 나갈 정도로 독특한 아이디어를 가진 친구들은 아주 많았다. 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중학생 시절, 내가 쓴 시가 전시되었을 때 나는,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았다. 소중하게 그려 넣은 그림과 운율을 살려 써 내려간 글을 보며 뿌듯했지만 이마저도 고등학교 진학 이후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사람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훨씬 많았고, 그들에 비해 나는 한참 모자랐다.






특출 나게 무언가 잘하지도, 그렇다고 모든 걸 못하지도 않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반쪽짜리 같이 느껴졌다. 아무리 보아도 나에겐 반쪽짜리 능력만 있을 뿐이었다. 남들보다 부족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자 나 자신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언가 시작할 용기도 잘 나지 않았다. 반쪽짜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한 걸까.', '혹시 다른 사람들보다 가진 게 없는 걸까.', '대체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이런 생각들에 빠져 있었다. 이 생각들 때문에 누군가 칭찬을 하더라도 내 능력을 부정하며 계속해서 모자란 부분에만 집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TV 프로그램을 보았다.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개그우먼 장도연 씨가 등장해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건넸다는 사실은 기억이 난다. 당시 그 말을 들으며 묘한 위로를 얻었지만 한 편으론 정말로 내가 괜찮은 걸까 생각했다. 부족해서 괜찮지 않은 내가 정말 괜찮은 걸까. 괜찮다고 애써 위로해 보아도 사라지지 않는 내 부족함을 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편견 어린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세상을 관찰하기 시작한 작은 어른,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는 사람이 되었다. 관찰자가 된 이후로 그는 산책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하게 됐다. 산책을 하면 고요한 마음으로 여러 대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작은 어른은 여느 때와 같이 도시를 걷다가 문득 새로운 길로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마침 도시 끝자락에서 뒷동산으로 이어진 오솔길이 보였다. 그는 오솔길을 향해 걸었다.


‘저 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기대감을 가지고 길에 들어선 작은 어른은 솔솔 불어오는 바람 사이에 깃든 풀내음을 맡았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무 사이를 재빠르게 오가는 다람쥐, 쫑알거리며 수다를 떠는 이름 모를 새, 그리고 길가를 따라 흐드러지게 핀 꽃들. 딱딱한 도시 바닥과는 다르게 묘한 포근함을 주는 흙길은 단단한 구름 위를 걷고 있는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평화로움을 즐기며 한참을 걷던 작은 어른은 잠시 쉬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잘린 나무 밑 둥에 앉았다. 가만히 숨을 고르며 앉아있으니 조용히 피어난 민들레가 보였다. 민들레는 하얗게 변한 채 씨를 날려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입으로 바람을 후 불어 씨앗을 날려 보냈다. 씨앗들은 바람에 흩날리며 춤추듯 퍼져나갔다.


'저 작은 씨앗들이 정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흩날리는 홀씨들을 바라보던 작은 어른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붉은빛의 하늘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겉옷을 벗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아까 날려 보냈던 작은 씨앗 하나가 겉옷에 붙어 있었다. 작은 어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창문을 열고 다시 입바람을 불어 홀씨를 날려 보냈다. 그 이후 민들레 씨앗은 작은 어른의 기억 저 편 너머로 사라졌다.




평소처럼 출근하던 그는 마당에 돋아난 이름 모를 새싹과 마주했다. 첫째 날에는 그냥 잡초이겠거니 생각하고 바쁘게 걸음을 옮겨버렸다.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출근할 때마다 묘하게 그 싹이 신경 쓰였지만 슬쩍 보고 이내 급하게 출근하기 바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작은 어른은 깨달았다. 그 새싹은 겉옷에 붙어있던 민들레 홀씨였다. 뿌리를 내리고 선명한 노란빛의 꽃을 피운 홀씨였다. 작은 어른은 만개한 민들레를 빤히 쳐다보다 생각에 잠겼다.


‘작고 연약했던 그 홀씨가 결국 꽃이 되었네... 너는 네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지 알았을까?’


그가 생각에 빠져있던 그때, 옆집 고양이가 야옹 거리며 마당에 들어왔다. 고양이는 살금살금 새 한 마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작은 움직임이 느껴지자 작은 어른은 고개를 들었다. 튼튼한 다리로 새를 쫓는 고양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용맹해 보이는 저 고양이도 처음엔 힘없는 아기 고양이였겠지. 멋진 어른 고양이가 될지 몰랐을 거야 그때는.’


고양이는 빠른 속도로 나무에 올라가 그곳에서 자신을 약 올리고 있는 새와 티격태격 다툼을 이어갔다. 작은 어른의 시선도 고양이를 따라 나무로 향했다.


‘그래 지금은 내 키보다 더 자란 저 나무도 처음엔 아주 작았어. 나무도 자기가 시원한 그늘을 줄만큼 커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거야.’


작은 어른이 나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 고양이의 앞발 공격에 화들짝 놀라 나뭇가지에서 날아오른 새가 푸른 하늘 속으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도 따라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저기 떠 있는 뭉게구름도 형체 없이 이 땅 어딘가에 고여 있던 물이었겠지. 처음부터 구름은 아니었을 거야. 저 물은 자기가 구름이 될지 몰랐겠지?’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하고 있는 구름을 보던 작은 어른은 무릎을 탁 치며 생각했다.


‘그래. 심지어 지구를 품고 있는 우주도 작은 점에서 시작했잖아.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생명체를 품는 배경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작은 어른은 다시 민들레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작고 연약해 보였던 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었구나. 부족함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세상의 이치에 따랐을 뿐이지.”





머릿속이 복잡해 산책을 나간 적이 있었다. 걷고 걸으며 이 세상을 관찰하다 보니 모든 것의 시작이 궁금해졌다. 처음 시작은 작은 꽃이었다. '작은 점 같은 씨앗이 꽃을 피웠네. 저 꽃은 자기가 꽃이 될 줄 알았을까?' 꽃으로부터 시작된 생각은 점점 확장됐다. 더 큰 나무, 동물 그리고 사람까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나무도, 아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사나운 호랑이도 처음엔 모두 작고 여렸다. 나무라고 말하기에, 호랑이라고 칭하기에 조금 모자라고 부족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나무와 호랑이는 그들만의 과정을 거쳐 나무답게, 호랑이답게 성장했다. 세상 모든 것이 그 과정을 거치며 성장했다. 눈 씻고 찾아보아도 처음부터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태어나는 존재는 없었다. 모두 성장이라는 과정을 거쳐 자신에게 필요한 모습을 점점 갖춰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더 무궁무진한 과정을 거쳐 다채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다. 작은 세포에서 시작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이후에도 성장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때 성장하는 건 육체만이 아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저마다의 가능성 또한 함께 성장하며 만들어져 간다.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다양성을 가지고. 




인터넷을 떠돌다가 “소질이 있어야 시작하지만 그걸 꾸준히 해야만 재능이 된다.”라는 출처모를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저 짧은 문장에서 "우리에게는 원래 반쪽짜리 가능성이 주어진단다!"라는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반쪽짜리, 부족한 나를 보며 쓰던 표현. 반쪽짜리는 더 이상 한계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 단어는 가능성을 표현해주고 있었다. 완성형이 아닌 반쪽짜리이기에 내가 가진 가능성이 얼마나 자랄지, 어떤 모양으로 변할지 함부로 규정지을 수 없었다.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채워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그게 반쪽짜리라 불리던 부족함의 의미였다.


누구나 세상의 이치에 따라 부족함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반쪽에 깃든 오색빛깔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친다. 저마다 그 과정의 속도는 다르지만 굳이 다름에 집중할 필요는 없다. 틀린 것도, 뒤처진 것도 아니다. 그저 다를 뿐이다. 부족함에 대한 정의를 바꾼다면 옆사람과 비교하며 느꼈던 나의 모자람에 더 이상 아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상대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잘난 모습을 보고 나의 부족함에 집중하게 되기 마련이다. 반대로 상대의 부족함에 집중하여 그를 함부로 판단하는 시선을 보내게 되기도 한다. 이제는 나와 너를 깎아내리며 아파하는 대신 부족함의 정의를 새롭게 바꿀 때다. 



 '누구나 겪는 세상의 이치', '무한한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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