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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Oct 08. 2020

관찰자로 살아가기

순수하게 관찰하는 눈으로

아주 아주 오래전,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속한 존재였다. 자연에 순응하여 계절에 맞는 먹거리를 구하고, 상황에 맞게 거주지를 옮겨가며 그 일부로서 살아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연을 이용해 무언가를 해낸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면서부터 자연과의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연 속 여러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특징을 따 이름을 붙였고, 이때부터 자연밖에 서 있는 관찰자가 되었다.


관찰자가 되니 자연의 일부일 때는 몰랐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동식물들에게 그에 맞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에 그쳤지만, 더 나아가 자연현상을 비롯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부분에까지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어떤 대상을 명명한다는 것은 대상의 특징을 잘 알게 된다는 뜻과 같다.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는 없는 법이다. 관찰자가 된 인간은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의 특징을 알게 되어 그에 맞는 이름을 불러주었고, 그것들을 이용하며 자연을 다스리는 존재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우리는 현재에도 이런 행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과학자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관찰하여 이름 짓는 것, 사회학자가 기존에 없었던 현상에 이름을 짓는 것이 모두 이런 행동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이렇게 지능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현대문명이 발달한 오늘날까지 항상 관찰자로서 살아왔다. 그런데 그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순수했던 관찰의 눈이 변하기 시작했다. 자연을 관찰하던 눈이 내 옆의 누군가에게 비뚤어져 향하면서 변질되었다. 그 눈은 타인과 나를 비교하여 슬퍼하거나 우월감을 느끼는 데 쓰이기도 했고, 누군가를 규정지어 가능성을 가둬버리는 데 쓰이기도 했다.







나다움, 너다움을 존중해야 잃어버린 이름을 찾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작은 어른. 그는 전보다 조금은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나, 너는 너. 비교의식에서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른 사람과의 인간관계는 쉽지 않았다. 판단할 대상으로, 경쟁할 대상으로 바라보던 습관은 바꾸기 어려웠다. 너다움을 존중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이해가지 않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 저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그런 고민을 하며 지내던 작은 어른은 어느 날 가장 친한 친구와 다투게 되었다. 그 친구는 답답한 시선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던 사람이었다. 지금껏 싸울만한 일이 없었지만 그 날은 왜인지 날카로운 신경전이 오고 갔다. 그가 이 다툼에서 유독 화가 났던 이유는 친구가 말하던 도중 자리를 떠버렸기 때문이었다. 작은 어른은 생각했다.


'인간관계에서 회피가 제일 나쁜 거라던데.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길래 회피해버리는 거지? 나는 풀려고 노력한 건데 왜 그냥 가버리는 거야!'


그는 친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툼이 오고 가던 그 순간을 홀로 곱씹어보니 이제껏 보여줬던 모습이 꾸며진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환기를 시켜야 했던 작은 어른은 전에 갔던 뒷동산이 생각났다. 그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상에 거의 다다르자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어른은 살금살금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 소리는 동산의 중앙에 있는 큰 나무 쪽에서 나고 있었다. 조금 더 다가가니 나무 뒤편으로 누군가의 형상이 보였다. 작은 어른의 움직임에 인기척이 느껴지자 노랫소리는 끊겼고, 그 적막을 누군가의 편안한 목소리가 채웠다.


"안녕, 너 저번에 여기 왔던 친구구나. 그때는 내가 저기 저 굵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곡을 쓰느라 인사를 못했어. 내 이름은 마노아야."


자신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를 보며 작은 어른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다.

'내가 여기 왔을 때 있었다고...? 아니, 그보다도 어떻게 이름이 있지?'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춘 채 물었다.  

"안녕, 나는 작은 어른이라고 해. 너한테는 어떻게 이름이 있는 거야...? 마노아라고?"


그의 물음에 마노아는 빙그레 웃었다.

"마노아는 휴식, 평안이라는 뜻이야. 나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인데, 노래를 만들다 보면 자유로워지거든. 그 자유에서 평안을 얻곤 해. 그래서 내가 나한테 마노아라는 이름을 직접 붙여줬어. 나를 잘 표현해주는 단어니까."


작은 어른은 직접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사실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멍하니 있던 그의 머릿속에서는 눈 앞의 이 친구와 어울리면 지금 드는 답답한 마음이 가실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직접 이름도 짓고 사는 마노아라면 자신에게 해답을 줄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기대가 차올랐다. 작은 어른은 마노아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있잖아, 마노아. 노래를 만들다 보면 자유로워진다는 말이 무슨 뜻이야?"  


"그건 말이지. 관찰에서 오는 자유로움이랄까? 가사를 쓰려면 무엇이든 잘 관찰해야 해. 그래야 내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되고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거든. 그런 이해의 시각이 담긴 곡을 만들 때마다 점점 내 시야도 열리더라고. 못 보던 것들을 본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야."


"관찰? 어떤 걸 관찰해야 하는데?"


"관찰하는 대상이 자연이라면 가만히 숨을 죽이고 꽤 오랜 시간 지켜봐야 해. 예를 들어 들꽃이 바람에 어떻게 흔들리는지, 비가 올 때는 어떻게 반응하고 햇빛이 내리쬘 때는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모습들을 보면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더라."


"만약 그 대상이 사람이면? 그때는 어떻게 관찰해야 할까?"


"음...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여러 상황들 속에서 그 사람이 대처하는 방식을 보고 '이런 모습도 있구나, 저런 모습도 있구나' 발견하는 방법이 있어.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과 나눴던 대화를 되짚어 보는 게 좋은 것 같아. 상대의 가치관이 드러나거든. 그걸 관찰하면 이해하기 더 수월하더라."


그는 마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마노아는 그런 작은 어른의 표정을 살피더니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조심스레 구슬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투명한 구슬이었다.

"친구야, 이건 회상의 구슬이라는 건데 네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될 거야. 빌려줄 테니 사용해보렴! 어떤 상황이든 판단보다는 발견에 초점을 두는 것, 잊지 말고."




작은 어른은 웃으며 손을 흔드는 마노아를 뒤로 하고 빠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회상의 구슬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떻게 쓰는 거랬지? 그러고 보니 사용 방법을 안 물어봤네. 얼른 친구랑 풀고 싶은데...'


작은 어른이 구슬을 바라보며 친구를 떠올리던 그때 구슬 안에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 비친 모습들은 작은 어른의 기억이었다. 그는 눈 앞에 재생되고 있는 그 기억들을 하나씩 관찰했다. 그리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서였다.


"미안해 친구야."


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던 친구, 그러나 정작 작은 어른은 자신의 판단으로 친구를 바라봤다. 친구의 상황과 환경을 잊고 자신의 생각을 더 우선해서 바라봤다. 그러니 당연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랜 시간 함께 하며 겪어온 그 친구는 다툼이 거의 없는 집안에서 자라났다. 자라온 환경도 그랬지만 그 친구의 성격 자체도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어 누군가와 부딪히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들을 되짚어보고 관찰하다 보니 당연히 다툼 자체가 혼란스럽고 어려웠겠다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작은 어른을 무시한 게 아니라 그저 그런 상황을 마주해본 적이 없을 뿐이었다.


작은 어른의 사과에 친구가 대답했다.

"내가 더 미안해 친구야. 사실 나 다툼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풀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랐어. 먼저 말 꺼내 줘서 정말 고마워."


잃을 뻔했던 친구를 되찾은 작은 어른은 그때 깨달았다.



'인간관계에서 우선 되어야 하는 건 관찰이구나.'




사람은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다. 선과 악, 기쁨과 슬픔, 평안과 불안함 등 서로 반대되는 요소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조용한 듯 보이다가도 활기찰 때가 있고, 활발한 것 같으면서도 홀로 조용히 사색할 때가 있다. 공존할 수 없어 보이는 모습들을 하나의 마음에 품은 걸 보면 사람은 평면 도형이 아니라 입체 도형이다. 다양한 면을 가진 입체 도형이라 한 부분만으로는 그 전체 모양을 정의 내리고 판단할 수 없다. 


관찰은 상대방이 가진 여러 면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이게 만든다. 그동안 헤아리지 못했던 숨겨진 이유가 보이도록 만들어 주는가 하면, 상대를 이해하여 오해를 풀어주는 역할도 한다. 더 나아가 경쟁의 시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돕는다. 타인을 관찰하는 대상으로 여기게 되면 그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지 않게 된다. 판단과 비교라는 나만의 생각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상대의 모습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먼 조상 때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관찰자의 눈을 되찾을 때다. 비교 의식과 판단을 제한 관찰은 상대의 진정한 특징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멋진 경험을 선사한다. 경쟁과 판단이 아닌 관찰을 목적으로 그동안 깎아내리고 내 멋대로 규정짓느라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던 상대방의 모습을 살펴보자. 누군가를 순수한 마음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면 비교의식에서 벗어나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자유한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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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자. 우리는 원래 관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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